<아몬드>, 손원평, 창비
화를 낼 법도 한데, 화를 내지 않는다. 무서워할 법도 한데,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용감한 사람? 무던한 사람?
그 아이는 괴물이라고 불렸다. 어쩌면 맞는 말이었다. 그를 지극히도 사랑하는 할머니마저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으니까. ‘귀여운’ 괴물이라고 부른 점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사회에서 소외된 한 남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인해 할머니가 눈앞에서 죽어 나가고, 엄마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도 아이는 그저 바라본다. 울부짖으며 달려들지도 않고, 범인의 멱살을 잡지도 않는다. 할머니와 엄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아이가 평범하게 살도록 그렇게나 감정을 학습시키고, 반응을 연기하도록 도왔건만, 그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확실히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 아이는 뇌의 일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뇌에는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은 주로 인간의 ‘정서’에 관여한다. 특히 혐오스러운 감정, 두려워하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위험을 미리 인지하고 피할 수 있게 된다. 아몬드가 고장 나면? 아마도 꽤 많은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책 속의 그 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비단 이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말이다.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싫은 소리는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모습. 울어도 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 좀 없어 보여도 괜찮은데, 나는 멀쩡한 아몬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 진짜 감정은 없는 척 숨기고 다른 감정을 연기한다.
진짜 두려워해야 하는 건 타인과의 갈등이나 남의 평판이 아니다. 감정을 숨기고 나를 속이며 살아가다가 진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해, 스스로 멀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거니까. 아몬드가 사라졌어도, 아니면 조금 고장 났어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
그 아이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감정 없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품어낸 그 사랑을. 비록 딱 한 명이지만, 친구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자신을 편견없이 바라봐 준 그 아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겠지만. 그리고 소녀로부터의 사랑도, 윗층 아저씨의 사랑도 있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거창한 작은 ‘관심’일 뿐일지라도, 그 사랑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그리고 사랑을 믿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사랑을. 그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