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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필사

by 김이안


맘먹고 제법 값이 나가는 반양장 노트를 샀다. 짧은 칼럼이나 한 편의 글 전체를 필사해보기 위함이다. 한두 문장을 필사하는 것도 좋지만 호흡이 긴 글 전체를 필사하면 문장의 이음새나 글의 전개 과정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반양장 노트를 사면서 펜도 하나 같이 샀다.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반양장 노트의 포장을 뜯고 새로 산 펜으로 글씨를 써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번진다.



필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노트와 펜도 서로 맞는 조합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동안 짧은 문장 필사를 위해 사용한 2000원짜리 '아이비스 마이 드로잉북 노트'에는 '모닝글로리 마하 슬림 0.28 수성펜'이 잘 맞는다. 드로잉지라 종이가 두꺼워서 그런지 잘 번지지 않고 적당한 마찰력이 있어서 또박또박 쓰기에 좋다.


위 '유니볼 시그노 0.38'과, 아래 '마하 슬림 0.28'


이번에 새로 산 반양장 무지 에코 노트에는 '유니볼 시그노 0.3 펜'의 조합이 괜찮다. 잘 번지지 않으면서 종이 위에 부드럽게 글씨가 써진다. 그렇다고 너무 미끄럽지도 않다. 손에 힘을 빼고 조금 편안한 기분으로 글씨 쓰기 딱 좋은 마찰력이다. 펜의 굵기도 적당해서 다 쓰고 나면 글씨의 가독성이 좋다. 장문을 쓰기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위 '아이비스 마이 드로잉북'과 아래 '반양장 무지 에코노트'


필사는 어찌 보면 느리게 읽기의 끝판왕 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사를 하면 작가의 생각과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깊이 스며든다. 글자의 욕조 속에 몸을 푹 담그는 느낌이다.



필사할 때 하루의 번민과 고뇌를 잠시 잊는다. 마음이 고요해지며 차분해진다. 책 속에 있던 문장이 내 노트에, 내 글씨체로 옮겨지는 순간 그 문장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필사하고픈 글과 문장이 여러 개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품에 간직한 문장이 많은 사람은 진정 마음의 부자다. 필요한 상황에 그때그때 꺼내어 곱씹을 문장이 많은 사람은 마음을 더 수월하게 추스를 수 있다.



두 개의 펜과 두 권의 노트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아, 오늘은 펜과 노트를 들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필사하고픈 문장이 가득 들어 있는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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