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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Jan 30. 2024

끝은 온다


노트에 거의 4개월여간 나를 힘들게 했던 프로젝트와 그 밖의 일들을 적어보았다. 산을 하나 넘으면 그다음 또 산 같은 미션이 주어지고, 간신히 또 하나를 완료했다 싶으면 또다시 거대한 산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밖에 자잘하게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업무들도 적어내려 갔다. 수많은 언덕과 고개들을 넘어 이제 앞이 탁 트인 널따란 산등성이에서 지나온 산자락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마지막 회. 우영우가 아침부터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골똘하게 고민하다가 외친 단어가 있다. 쿵짝짝 쿵짝짝 리듬을 타며 그동안 못 통과하던 회전문을 어렵사리 통과한 후 이렇게 말한다.


"뿌듯함! 오늘 아침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은 바로, 뿌듯함입니다!"



그렇다. 모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그동안 잘 버텨왔다고.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지난 4개월간 이 프로젝트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던가. 또 얼마나 이 상황에 대해 원망했던가. 왜 이런 일이 내게 주어졌나 하면서. 그러나, 이제 이렇게 지나고 보니 내가 지나온 굴곡진 산자락들이 운치 있는 풍경으로도 느껴진다.



지나고 보면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은 일을 마주하고 통과한 후, 이와 비슷한 후련함과 홀가분함을 느낀 적이 종종 있었다. 간절히 원했던 대학에 떨어졌을 때, 그동안 공부한 시간들이 빛을 발하지 못해 억울함과 좌절의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냈었다. 결국 안중에도 없었던 대학에 입학해 한 달 정도 학교 생활을 하던 중, '이 학교에서의 대학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걸?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진 적이 있었다. 앞으로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도 다 받아주겠어'라는 그런 자신감과 함께.     



공군 학사장교 시험에 떨어지고 일반병으로 입대가 확정되었을 때도 나이 먹어 군대 가서 군생활이 꼬이겠다 생각하며 낙심했지만 예상치 않게 군악대로 들어가서 나름 재미있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며 군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난 10월-1월의 경험들도 내 삶에 한 둘레의 나이테를 그려냈다. 생활의 밸런스가 무너지고, 감정이 바닥까지 내려가고, 초조함에 입에서 단내가 났던, 출구가 보이지 않던 터널을 가는 듯한 시간이었어도,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지나온 시간들을 여유롭게 회상할 날들이 분명 온다고, 한층 더 성장한 나를 대견해하고 뿌듯해할 날이 올 거라고, 이번 프로젝트의 경험들이 또다시 말해줄 거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S.E.S. <달리기> 중 -



아무리 끝없이 아득해 보여도, 결국에 끝은 온다.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리라는 정언을 다시 한번 몸으로 체득해 간다. 탁 트인 곳에서 이마에 시원한 바람을 맞는 날은 온다. 그렇게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언젠가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뿌듯해할 날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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