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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베프

부부는 강제로라도 베프로 지내야 한다

by 김이안



"남편을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미셸 오바마가 어느 토크쇼에서 했던 말이다.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 이들 부부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버락 오바마 하면 꽤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상'의 이미지가 있지 않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절대 한가하진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버락 오바마는 '일주일에 5번, 딸들과 저녁식사 약속을 지키려 6시 반 칼퇴근을 한다'고 말하며 바쁜와중에도 가족과의 시간을 확보하려 한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난 그저 미셸이 시키는 대로 따릅니다. 그렇게 하면 일이 잘 풀려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솔직히 배알이 꼴렸다.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은 안다. 저 말이 얼마나 깊은 내공에서 우러나온 말인지를. 진위여부를 떠나 나는 거짓말이라도 저런 말 못 한다.



그런데 아내 미셸 오바마가 이 토크쇼에서 결혼생활을 돌아볼 때 버락을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니 속으로 좀 통쾌하기도 하고 뭔가 위안을 얻은 것도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부부도 어느 정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는 내가 내린 명제 때문인 걸까?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이 사람과 함께라면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것도 그다지 두렵지 않겠다. 오히려 재밌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연애할 때야 뭐 서로 사랑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분출되는 때 아닌가. 물론 이 사람이 내 배우자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결혼식 후, 부부로서의 삶이 시작되고, 비정상이었던 사랑 호르몬 수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가 둘의 관계가 시험대에 오르는 진짜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 션이 쓴 책과, 션이 나온 TV프로를 보고 나도 결혼하면 저렇게 해야지 라고 했던 것. 나 스스로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션처럼 되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 건 큰 오산이었다.



결혼 전에는 서로의 '다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지만 결혼 후 이 '다름'은 서로를 이해하는 걸림돌이 됐고 또 상대를 공격하는 창이 되기도 했다.



그동안 아내와의 크고 작은 갈등 상황을 돌아보니, 문제는 요 '혀', 곧 '말'이었던 것 같다. 작은 불씨가 어마 무시한 산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잘못 내뱉은 말 한마디가 갈등의 폭풍을 몰고 왔다. 이런 의미에서 아내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몇 가지 나의 망언을 떠올려본다.




"내가 싫어하는 색깔만 들어있네"



다시 돌아봐도 어이가 없는 심한 무개념의 말이었다. 아무리 옷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아내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고르고 골라 사온 셔츠를 보고 이런 말을 내뱉다니.



물론 아내와 나는 좋아하는 색감이 참 다르다. 아니, 각설하고, 어쨌든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안됐을 때 했던 말 같은데 아내는 꽤 오랫동안 이 사건을 상기하며 나를 코너에 몰 때 종종 활용했다.




"왜 이렇게 안 와? 아직 출발 안 했지? 우리 그냥 집으로 갈게."



문장으로만 보면 뭐 그렇게 망언은 아니다 싶지만, 사실 아내의 상황을 좀 더 생각했어야 했다. 지난가을, 태풍이 지나가고 모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탁 트인 공원으로 나갔다.



아내는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직장이 있어서 보통 나보다 늦게 집에 도착한다. 그래도 이 날 저녁 공기가 선선하고 모처럼 함께 걸으면 좋을 것 같아 공원으로 오라고 했다.



집에서 공원까지는 차로 한 10분. 아이와 함께 산책도 하고 연도 날리며 신나게 놀았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내가 오지 않는 것. 배는 고파 오고 슬슬 짜증이 났다.



'왜 이리 꾸물대고 안 오는 거야'



아이와 놀만큼 놀고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기다리다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원에서 만나 같이 걷다가 외식을 하고 집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아내는 오지 않고, 배는 고프고, 아이도 빨리 집에 가자 하고.. 그래서 아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렇게 말해버린 것. (짜증을 실어서)




"왜 이렇게 안 와. 아직 출발 안 했지? 우리 그냥 집으로 갈게."



그런데 나중에 상황을 들어보니, 아내가 집을 지나 공원을 향해 올 때쯤이 길이 엄청 막혀 도로 위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했다고. 아내도 아내 대로 피곤하고 지쳐있었는데 내가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저렇게 말한 거다.



그냥 '어디쯤 오고 있어?' 정도로 물어도 됐을 텐데, 굳이 집에 들러서 아예 출발도 안 한 거 아니냐고 내뱉었으니... 돌아보면 '말 한마디' 잘못한 게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갈등으로 이어진 경우가 참 많았다.



아내와 이제 부부가 된 지 7년 차, 이 정도면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됐다 싶은데도 종종 말 한마디 때문에 사달이 난다. 또 이 '말'에 대한 문제 말고도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신경 쓰고, 지켜가고, 가꿔가야 할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 전 아내의 카톡이 왔다. 내 연락처 닉네임을 '강제베프'라고 바꿨다고. 이유를 물으니, 싸우든 어쩌든 강제로라도 베프로 지낼 수밖에 없는 관계라 그렇게 지었다 했다. 강제베프.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표현이다.



부부 사이는 어쨌든 베프인 상태라야 삶에서 소소하고 다양한 행복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베프와 사이가 안 좋은 날엔 확실히 하루가 힘들다. 남은 생애, 어쨌든 서로를 돌보는 반려자로 살아보자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리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으로 보였던 버락 오바마도 아내 미셸에게 '창밖으로 밀어버리고 싶은 남편'이었다. 그렇다. 부부 사이, 갈등이 완전히 없을 순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오래가는 갈등은 결국 팀킬이다. 그래서 아내의 표현대로 부부는 '강제로 베프로 지내야 하는 관계'가 맞는 것 같다.



너하고 나는 친구 되어서

사이좋게 지내자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꼭 꼭 약속해



얼마 전 딸아이가 흥얼거렸던 동요인데, 강제베프와 딱 맞는 동요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서로 평생 친구 하기로 서약했으니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우리는 베프니까. 강제로라도 베프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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