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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May 23. 2021

백점이에요

예상치 못한 고백과 같았던 말


아내의 권유로 어느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정된 도서를 읽고 에세이를 써오는 모임이었다. 대학교 졸업 이후로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쓰는 숙제는 처음이었다. 부담이 되긴 했지만 책을 읽고 내 생각을 한 문장, 한 문장 채워가는 느낌이 좋았다.


모임에서는 각자 자기가 써온 글을 소리 내어 읽어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 글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던지. 글을 낭독한다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확실히 글쓰기에는 도움이 됐다.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을 때 어색하거나 틀린 문장을 그 자리에서 발견하고 얼굴이 시뻘게지지 않기 위해 미리 몇 번 소리 내어 읽고 고쳤다. 신기하게도 소리 내어 읽으면 어색하거나 호흡이 긴 문장들이 잘 드러났다. 강사님이 낭독의 방식을 고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 번째 모임 날 아침, 과제 에세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출근을 했다. 점심을 최대한 일찍 먹고 마저 썼으나 시간이 여전히 부족했다. 이 날 따라 뱃속에서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나고 불편하더니 오후에만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퇴근 시간 즈음에는 볼 일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기력이 없었다. 그래도 글 마무리는 하고 모임에 가려했으나 도통 진전이 안 됐다. 출발해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 데, 글은 제자리고, 몸 상태는 안 좋고. 오늘만 빠질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지만 그래도 출석하는데 의의를 두기로 하고 가방을 챙겼다.


무사히 모임 시간 안에는 도착했지만 미완성한 에세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한 분 씩 자신의 글을 읽었고, 뒤이어 강사님 피드백을 해주셨다. 드디어 내 차례. 갑자기 툭 끊긴 글을 발표해야 한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마무리를 잘 못했는데 일단 읽겠습니다"


낭독이 끝나고 강사님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강사님께서는 일단 맞춤법이 틀리거나 오탈자는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문장 길이도 호흡이 길어지는 부분 없이 적당하다며 칭찬해주셨다. 글의 맺음 부분도 오히려 이렇게 끝난 게 담백한 것 같다며 하시는 말씀,

 

'김OO 선생님, 글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틀린 문장도 없네요. 백점이에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백점? 너무나 오랜만에 들은 단어여서 머리가 살짝 멍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마무리가 안 된 툭 끊긴 글인데!' 강사님의 말을 의심하며 다른 선생님들을 둘러보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모임 후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강사님이 해주신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백점이에요' '백점이에요' 백점이란 말을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던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글로 도리어 칭찬을 듣다니.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고백을 받은 것처럼 살짝 멍하면서도 들뜬 마음이 잠들기 전까지 지속됐다.  


이날이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쓰는 사람이 되는 전환점. 이후로도 나는 글쓰기 모임에 꾸준히 참석했고 글쓰기 플랫폼에도 꾸준히 글을 쓰게 됐다. 쓰는 사람이 되니 일상을 유심히 관찰하게 됐고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할 때는 글로 쏟아내었다. 하루가 공허하다고 느껴질 땐 글로 그날의 의미를 지어냈다. '글 쓰는 나'는 다양한 역할에서의 '나'를 지탱해주었다.


도무지 공통의 취미가 없던 아내와도 '글쓰기'를 매개로 더 가까워진 듯하다. 때로는 말보다 글에 그 사람의 심정과 생각이 더 깊이 담기기에 아내가 쓴 글을 찾아 읽는다. 가끔씩 내가 올린 글로 행적이 드러나 곤란해질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대화의 소재가 된다.


"김OO 선생님, 백점이에요."


아직도 마음속엔 강사님의 이 한 마디와 온기가 남아있다. 그 온기에, 쓰는 사람이 되어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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