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혼자 비행기를 타봤다. 4월의 봄날, 내가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삶이란 역시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유의 예상치 못한 상황은 환영이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어서 홀로 제주에 올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아내에게 감사한다. 장인 장모님에게도. 덕분에 홀로 긴 여행을 했다. 일정을 자유롭게 조정하고 선택할 수 있었다. 홀로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먹는 것, 자는 것, 돌아다니는 것 등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 말이다.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함이 주어졌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궁금했다.
책방 찾기와 책 읽기
제주에서 보낸 시간 중에 가장 좋았던 경험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책방 구석에 앉아 책을 읽은 시간이 아닐까 싶다. 따듯한 차를 마시며 어떤 재촉이나 쫓김 없이 천천히 책 속 문장들로 스며들어 갔다. 그러다 좋은 문장이 나오면 노트에 메모를 하다가, 잠시 눈을 감고 서점을 둘러싼 책들과 분위기를 음미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만큼의 호사가 또 있을까? 나에겐 편안하고 여유로운 독서의 시간이 오롯한 충만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책 읽기는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책을 읽는다는 것. 지금껏 해보지 못한 색다른 여행의 방식이었다. 독서도 분명히 공간을 타는 듯하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읽는 책은 낯설지만 더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브런치북 발행해보기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써봤다. 그렇게 쓴 글을 모아 브런치북을 한 번 만들어보기 위해서였다. 몇 주 전부터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광고를 보았으나 사실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상이나 읽은 책 내용을 되새겨보고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주제로 묶이는 글을 몇 개씩 쓰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에 와서 '한 번 시도해볼까'라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마감 기한을 보니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쓴다면 마감일까지 최소 개수인 열 개의 글을 묶어 발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에 대해 쓸지가 문제였다. 마침 글쓰기 모임 단톡방에 요즘 직업 에세이가 유행이라는 기사를 누군가 공유해주었다. 기사를 읽고 옳다거니 했다.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서, 내가 했던 일들에 관한 글을 쓰면 되겠구나.
첫 글을 쓰고 나니 다음 날 또 쓸 거리가 생각났다. 그날 잠들기 전을 마감으로 생각하고 어떻게든 한 편을 마무리하고 잤다. 그렇게 제주에서 한 편씩 글이 쌓였고 결국 처음으로 브런치북을 발행하게 됐다. 정식으로 출간된 것도, 종이책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내 이름으로 낸 첫 책이었다.
혹시 모른다. 이 작은 경험이 씨앗이 되어 나중에 진짜 책 출간으로 이어질지. 어쨌든 제주에 있으면서 하루하루 글을 썼고 작은 책 하나를 만들었다는 뿌듯함이 남아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 씻기
자연은 확실히 치유의 효과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말을 이용해 산에 오르고 바다를 찾는 것이리라. 제주의 바다를 보며 걸었다. 카페에서도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바다를 계속 보다 보니 그 비췻빛 물결과 일렁임이 마음을 씻겨주는 것 같았다. 맑은 공기와 바람도 마음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주었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제주 여행에서 스스로 참 잘 결정했다 싶은 일정은 바로 우도에서의 1박 2일이었다. 신혼여행 때 잠깐 왔었던 우도의 언덕과 풍경들이 마음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 보다 숙박비가 비싸도 우도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스쿠터와 전기차를 타고 우도의 해변 길을 돌았다. 우도의 바다 색깔을 입체적이었다. 밝은 옥빛과 푸른 남색이 어우러져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행책에서 추천한 대로 우도 보트 투어를 신청했는데 바다를 가로지르며 우도의 절경과 동굴을 탐방했던 건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신나고 황홀한 경험이었다.
해 질 무렵 숙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마주한 청보리밭과 바람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돌담들, 그 위에 쏟아지는 노을빛은 만약 천국이 있다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보고 느끼면서 마음에 환기가 일어났다. 응어리가 녹아갔고 묵은 때가 씻겨져 갔다.
선물 같았던 휴가를 마치고
제주 여행은 피폐해져 갔던 몸과 마음에 주었던 휴식의 시간이자 멈춤의 시간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였던 환경에서 벗어나 여유와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계획과 준비 너머, 내게 선물로 주어진 쉼의 시간이었다. 이제 마주하게 될 새로운 상황들 속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공항의 게이트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