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어머니는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책을 꺼냈다. 거실 등을 끄고 스탠드만 켜니 자연스레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낭독이 시작됐다.
첫 번째 그림책 낭독이 끝나고 다음 책 낭독이 이어졌다. 두 번째 책은 '꽃들에게 희망을'. 아, 이 책은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그 추억의 책. 거실 반대편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나도 어느새 어머니의 낭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이들은 한 명씩 스르륵 잠에 들었다. 5살 난 막내 손녀가 먼저 잠들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보니 7살 기쁨이도 눈꺼풀이 완전히 감겨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결코 적은 분량의 글이 아니었다. 경험상 저 정도면 목이 타고 입에서 단내가 날 법한데도 어머니는 계속 읽으셨다.
"아무것도 없잖아!"
"입 다물어, 멍청아! 저 밑에서 듣겠다. 우린 저놈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에 있단 말이야. 그게 바로 여기라니까!"
이 부분이 우스웠는지 졸린 눈으로 듣고 있던 7살 인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꽃들에게 희망을'하면 그 수많은 애벌레로 이루어진 기둥이 떠오른다. 다들 서로 그 기둥 위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서로를 밟고 올라갔던 게 기억이 났다.
어느새 나도 아이들 옆에 누워서 눈을 감고 낭독을 듣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책을 굉장히 오랜만에 들었다. 재미있었다. 책의 내용을 어머니의 목소리로 듣는데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책의 장면들이 상상이 됐다. 아이들이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이래서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거구나.
문득 내가 한 초등학교 2학년 때 즈음 어머니가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셨던 게 기억이 생각났다. 그 책의 이름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노구치 히데요'. 위인전이었다. 어렸을 때 화재 사고로 왼쪽 손이 불구가 되었으나 역경을 극복하고 나중에 훌륭한 과학자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내게 초등학교 4학년 이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셨던 기억이 아직까지 또렷이 생각나는 걸 보면 당시의 내게 참 인상적인 경험이고 추억이 되었던 것 같다.
한껏 몰입하며 들으며 나도 다시 자기 전 책 읽어주기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밤에 책 읽어줄 에너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 그림책을 아이에게 한 번이라도 읽어주었다면 잘 알겠지만 낭독은 정말이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침이 마르고 입에서 단내가 나며 몹시 피로해진다. 조금만 지나면 대충대충 읽고 빨리 책장을 덮고 싶다.
그러나 이번에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었던 게 다음날 일어나서 생각해보니 뭔가 아련하고 좋았다. 어머니의 목소리와 책의 내용이 뒤섞여 몽롱해지면서 서서히 잠이 들었던 그 느낌..!
듣는 아이도 이런 느낌이라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소리 내어 읽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가 서로 책을 한 챕터씩 읽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