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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Aug 25. 2021

풋고추 라면과 비겁한 거짓말

누군가를 가장 억울하게 한 기억



어느 날 저녁 아빠 엄마가 급히 외출을 하시게 됐다. 엄마는 서둘러 라면을 끓여 놓으시고는 동생과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하셨다. 동생과 나는 TV를 보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라면이 몸에 좋지 않다며 되도록 안 끓여주셨는데 그래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만들어주셨다. 그런데 엄마는 라면을 끓일 때 꼭 김치를 넣었다. 어린 시절 나의 작은 소원은 다른 건 안 넣고 오직 스프만 넣은, 본연 그대로의 그냥 라면을 먹는 거였다. 라면은 그 자체로도 맛있는데 엄마는 왜 굳이 김치나 다른 야채를 넣어서 맛을 이상하게 만드시는 건지.



분명히 엄마에게 몇 번이나 요청도 해봤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그냥 라면을 끓여주시면 안 되냐고. 그렇지만 상에 올라온 라면 속에는 어김없이 김치나 다른 야채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엄마가 끓여놓고 가신 라면에 그 어떤 첨가물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급하게 나가시느라고 아무거도 안 넣으셨구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쁜 마음으로 TV를 보며 라면을 먹는데 입에 뭔가 으삭한 게 씹혔다. '뭐지?' 하고 뱉어보니 얇게 썰어진 풋고추가 들어가 있었다. 풋고추라니! 모처럼 그냥 라면을 먹어보나 했는데 풋고추라니!



김치가 라면에 들어가 있을 땐 면만 먼저 먹고 김치를 마지막에 몰아서 먹거나 아니면 김치를 먼저 해치우고 면을 나중에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얇게 잘린 풋고추는 도저히 먼저 혹은 나중에 몰아서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크기도 작아서 면을 먹을 때마다 같이 들어가서 입안에서 걸리적거렸다. 아니, 웬만하면 그냥 아무것도 안 넣고 만들어주시지 굳이 또 이렇게 풋고추를 넣으시나.



순간 손에 집은 풋고추를 뒤로 던졌다. 그다음에 또 얇게 썰린 풋고추가 입안에서 느껴질 때도 손에 뱉어서 뒤로 던져버렸다. 당시 우리 집엔 작은방에 TV가 있었고 내가 앉은 자리 뒤쪽엔 거실이 있었다. 아무래도 작은 풋고추 조각이라 아무렇게나 버려도 티가 안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라면을 다 먹고 동생과 TV를 계속 보고 있다 보니 엄마 아빠가 돌아왔다.



"이거 풋고추 누가 이렇게 버렸어?" 



엄마가 풋고추 조각을 들며 말했다. 여기서 바로 나는 실토했어야 했다. 그러나 순간 나는 모르겠다고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고 이어서 엄마는 동생에게 똑같이 물었다. 동생은 당연히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엄마가 재차 물어도 나와 동생 둘 다 계속 부인하자 결국 엄마는 파리채를 가지고 오셨다.



상황이 심각해졌고 나는 진땀이 났다. 처음 엄마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하니 계속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라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이윽고 파리채가 나와 동생의 엉덩이 위로 스윙을 그렸다.



"왜 둘 다 아니라고 하는 거야? 계속 거짓말할 거야? 어서 얘기 안 해?" 



아, 나는 이때라도 그만 자백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왜 더 물오른 연기를 했을까.



"진짜 내가 안 했어요!" 



라고 울면서 얘기하자 엄마는 동생이 범인이라고 판단하고 동생을 추궁했다. 동생이 계속 아니라고 부인하자 엄마는 다시 동생에게 파리채를 댔다. 동생이 추궁당하는 걸 보며 어이없게도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제발 이번만 그냥 네가 했다고 해주라. 미안해' 



그렇지만 동생이 끝까지 아니라고 하자 엄마가 다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 솔직히 얘기해봐. 진짜 안 그랬어?" 



이제는 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 제가 그랬어요 엉엉엉~~" 



그날 밤 나는 사랑의 파리채로 호되게 맞았다. 엉덩이가 따끔하고 쓰라렸지만 그보다도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동생이 맞는 걸 보면서도 먼저 자백하지 않은 부끄러움이 마음을 더 쓰라리게 했다.



어느덧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그때 어머니가 라면에 김치, 그리고 풋고추(!)를 굳이 넣으셨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이해한다. 가뜩이나 라면이 몸에 좋지는 않은데 그런 야채라도 넣어서 같이 먹게 하고 싶으셨던 마음 아니었을까. 내가 종종 아이에게 밥을 비벼서 줄 때 상추나 파프리카 같은 것들을 잘게 썰어 넣어 비벼 주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 비도 내리고 하니 오늘 저녁엔 라면을 끓여 먹어볼까. 풋고추는 넣을까 말까 좀 고민이다. 아니, 그전에 오랜만에 동생에게 연락도 할 겸, 희대의 풋고추 거짓말 사건을 혹시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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