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생각>
카페에는 다양한 메뉴가 있다.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많은데, 대충 어림잡아봐도 서른 개는 훌쩍 넘는 것 같다. 거기다 계절마다, 해마다 신메뉴가 등장한다. 나는 손님들이 반납하는 컵을 보면서, 꽤 다양한 메뉴를 주문하는구나, 신기해한다. 동행이어도 누구는 쌍화차, 누구는 납작 복숭아 스무디, 누구는 초콜릿 라떼를 마신다. 과연 맛있을까? 나는 잔뜩 미심쩍어하며 설거지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에 밝힌 것처럼, 10년 이상 아이스 바닐라 라떼만 마셔온 사람이다. 카페 메뉴가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중에 ‘아바라’의 존재 여부만 확인하는 편이다. 아바라가 그렇게 좋으세요?라고 묻는다면 글쎄. 아바라에 너무 익숙해진 탓도 있고, 평소 주문대 앞에서 한참 고민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탓에 후딱 주문하기 위한 나름의 학습된 방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다른 음료의 맛이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카페에서 아바라 외의 다른 음료를 (이를테면 달고나 라떼나 오곡라떼) 주문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속으로는 이렇게 묻고 싶기도 하다.
“정말 그걸 마셔도 괜찮겠어요?”
그 메뉴들이 왜 싫으세요?라고 묻는다면, 역시나 글쎄 할 말이 없다. 나는 달고나 라떼도 오곡 라떼도 마셔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나는 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메뉴를 부정하는 걸까?
당연하게도, 나의 이런 편협한 시각은 커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도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들을 해석해 왔다.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생각했다. 나의 성공과 실패, 그에 따른 불안에 시달리느라 남의 인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나보단 평탄하겠지, 나보단 안정적이겠지. 하지만 커피와는 다르게, 사람에 대한 나의 편견은 생각보다 쉽게 깨졌다. 오랜 시간 같이 얼굴을 보며 일하다 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진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카페 일을 오래 하셨나요?”
나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천차만별, 모두 달랐다. 사람들은 각자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각자의 드라마 속 한복판에 살고 있었다. 커피와 아예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카페를 차리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사람, 어떠한 재난을 겪은 뒤에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진로를 바꾼 사람, 또 누군가는 카페 사장님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업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등등. 카페 메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양했다. 그들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잘 만들어진 캐릭터의 전사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 뒤로는 사람들을 보면 흥미가 생긴다.
저 사람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얼마나 흥미진진한 꿈을 꾸고 있을까? 저 사람의 앞으로는 어떻게 펼쳐질까.
“그래서 아직도 아바라만 마십니까?”
“음.. 아니요!”
덩달아 나의 커피도 아주 조금 복잡 용감해지고 있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아바라가 아닌, 콜드브루 연유라떼를 마시고 있다. 나의 미각도 더 다양하고 복잡한 맛을 경험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