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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24. 2020

남편의 승진을 대하는 나의 자세

  계획에 없이 전업주부 생활이 길어졌다. 처음 육아휴직은 아이들을 직접 키우기 위한 내 결정이었고, 그다음은 남편의 커리어를 위한 선택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해외 생활에 대한 설렘이 있었고 아이들의 영어 습득을 위해 좋은 기회라는 이유도 선택의 일부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밖에서 보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직접 해 본 해외 살이는 기대만큼 꿈같지 않았는데 만족감이 떨어지는 주된 원인은 내 안의 내적 갈등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70년대에나 썼을 법한 크기의 냉장고 덕분에 이틀이 멀다 하고 장을 봐야 했다.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싸고, 친구 사귀기를 위한 플레이 데이트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어눌해지는 한국어와 한국 수학 진도를 보충하는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물론 틈틈이 운동을 하고 책도 읽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현지인이 아니면 알 수 없을 명소와 맛 집을 탐방했다. 하루하루는 바쁜 듯했지만 생산적인 일이 하나도 없는 듯이 자주 공허했고, 머릿속에는 잉여인간이라는 단어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영어가 늘었지만 나의 자존감은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경제활동을 해야만 생산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사회 활동을 해야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워킹맘들이 어떤 마음으로 우는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는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아이들 옆에 있어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잘 안다. 그러나 이성적 이해와 무관하게, 주부로 살면서 무너지는 “나”라는 사람은 누구 엄마 말고 이른 봄(필명)의 무엇이 필요했다.           



  그러던 오늘, 남편이 승진 소식을 알려왔다. 집에 틀어박혀 아이들과 복작거리는 일상에 모처럼 찾아온 반가운 일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부모님들은 너무나 좋아하셨다.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여기저기 자랑도 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제일 먼저 전화를 받은 나는 목소리가 격앙되거나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좋지 않았다. 기쁜데, 더 기뻐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합격, 승진과 같은 성취의 순간을 맞이할 때 나도 저분들처럼 기뻐하게 될까. 자식일이 아니라 그런가, 기분 좋은 순간을 완전히 즐길 수 없는 내 마음을 납득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고, 친구 성적만 올라 샘이 나는 일차원적 시기는 아니다. 경제 및 육아공동체로 얽힌 부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보다 복잡다단한 감정이었다. 육아를 포함한 집안일은 한 사람이 덜 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만큼 더 할 수밖에 없는 제로섬이다. 늘 바쁘고 회사가 우선인 남편을 대신해야 했던, 엄마로 살았던 지난 시간과 현재가 용해되지 않은 채 마음에 남았다.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오늘, 승진 소식이 매개가 되어 서운함, 억울함, 상실감 같은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네 덕분이다, 네가 수고한 덕분에 얻은 결과라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편의 성취일 뿐이다. 그가 일에 집중하고, 인정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그저 누구 엄마가 되었다. 30분이면 저녁상을 차릴 수 있고, 탄 냄비의 검은 자국을 효과적으로 지울 수 있으며 욕실의 물때와 곰팡이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성취라 하지 않는다. 나 자신조차도.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나 보다. “나”의 노력에 “나”의 몫으로 주어지는 인정과 성취가 필요한 사람임을 새삼 깨닫는다. 누구의 엄마 아닌, 누구의 아내도 아닌 “나”로 남편의 다음 승진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엄마로 살아온 내 지난 시간을 인정해 주어야겠다. “잘했어. 수고했어. 내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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