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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실 Sep 24. 2022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방심하는 순간 물은 엎지르고, 엎지른 물은 돌이킬 수 없다.  



시즌 준비의 막바지, 나에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다. 바로 '교정/교열'이다. 인쇄, 제작, SNS 안내 등 여러 디자인에 들어간 텍스트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선수들의 프로필(포지션, 등 번호, 생년월일 등), 디자인의 컬러와 배열, 구단의 로고 등 모든 것이 맞는지 점검한다. 스포츠의 경우 포스터와 현수막, 소식지 등 경기를 홍보하고 안내하기 위해 인쇄해야 할 제작물이 많다. 선수들의 등 번호나 포지션, 경기 일정 등이 다르면 관객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으므로 인쇄를 넘기기 직전에는 교정을 보느라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진다.



달력과 포스터 같이 경기 일정과 선수가 함께 섞인 디자인은 최소 5번에서 최대 10번 가까이 교정을 본다. 달력은 한 달에 한 명씩 전 선수를 디자인하므로, 경기가 시작되는 그 해 10월부터 다다음 해 3~4월까지 총 약 28개월을 봐야 한다. 이때 12개월의 일수와 12 절기, 공휴일과 경기 일정, 특히 홈경기와 원정 경기는 가장 틀려선 안되기에 눈이 빠지도록 철저히 확인한다.  



2021-2022 시즌 전주 KCC 이지스 달력



디자이너분들은 텍스트를 그림처럼 한 덩어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셔서 교정을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나를 마지막으로 인쇄와 제작이 들어가니 교정을 볼 때는 책임감이 막중하다. 남한테 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해서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듯 확인한다. 이번 시즌 한 구단의 달력을 교정 볼 때 요일 표기 중 수요일이 미세하게 작아 보였다. 확인해보니 수요일이 다른 글자보다 1.5 포인트가 작았다. 디자이너분께서는 내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며 서둘러 글자 크기를 조정했다.



다른 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꼼꼼하게 교정을 보는 편임에도 내게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지난 시즌 한 구단의 달력을 교정 볼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원고와 대조를 하며 교정을 보고 있었다. 십여 번의 교정 후 마침내 원고를 넘기고 며칠이 지났다. 경기 일정이 들어간 다른 인쇄물 교정을 보는데,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홈경기에는 '잠실 학생체육관'이라고 표기되어야 하는데, 내가 정리한 원고에는 '잠실 실내체육관'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패닉 상태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왜 경기장이 바뀌었는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정보가 틀렸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알고 보니 구단에서 제일 처음 보내준 경기 일정 파일부터 정보가 잘못 기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고, 설사 정보가 잘못 기입되어 있더라도 홈 경기일 때 체육관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컸다. 문제를 인지한 그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왜 보지 못했을까, 팀장님께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미 달력은 마무리 작업일 텐데 등 등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찰나의 순간이 흐른 뒤, 나는 곧바로 팀장님께 향했다. 평소에도 실수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팀장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무서웠지만, 일이 터진 이상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게 내 실수를 책임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깊게 한 숨을 내쉰 팀장님은 인쇄 업체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대신 사과하며 문제가 생긴 월만 갈아 끼우도록 요청을 드렸다. 달력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나로 인해 두 번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상과 달리 팀장님은 크게 혼내시지 않았다. 어쨌든 구단에 납품을 하기 전에 해결은 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다. 내가 너무 바보 같고 미워서 계속해서 자책을 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자책을 할 게 아니라 최대한 멘탈을 다잡고 다른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정신을 차린 이후로는 다행히도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의 교훈을 통해 지금은 어떤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고, 인쇄를 넘기더라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올해 초인 5월 18일, SSG와의 경기에서 두산은 KBO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을 썼다. SSG와 2-2로 맞선 연장 11회 말, 1사 만루의 상황에서 두산의 조수행 선수가 때린 공이 좌익수 앞으로 떨어졌다. SSG의 좌익수 오태곤이 몸을 날려 슬라이딩 캐치를 했지만 공은 바운드되었다. 그 사이 3루 주자 김재호는 3루심이 좌익수가 타구를 놓쳤다는 신호로 양팔을 뻗기도 전에 곧장 홈으로 전력 질주했다. 조수행의 끝내기 안타와 김재호의 1 득점으로 두산이 역전승을 이뤄낼 수 있던 상황!!!



그때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SSG의 유격수 박성한은 공을 잡은 후, 2루 주자 정수빈을 태그 아웃하고 2루 베이스를 밟은 뒤 1루에 있던 안재석을 포스아웃 시켰다. 조수행의 공이 좌익수의 공에 잡힐 때쯤 기쁨의 포효를 하던 안재석과 정수빈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아웃이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중계를 하던 해설과 두산의 더그아웃, 상대편 SSG의 오태곤까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사이 심판진들이 모였다.

긴 논의 끝에 경기의 결과는 투 아웃으로 김재호의 득점이 인정되지 않고 이닝 종료로 끝났다.



조수행의 끝내기 안타가 갑자기 병살타가 된 상황.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문제는 1루 주자인 안재석과 2루 주자인 정수빈이 다음 베이스로 진루를 하지 않아서 발생했다. 정수빈은 혹시 모를 희생 플라이를 의심해 2루에 붙어 있었을 수도 있다. 진루를 하려 했어도 3루심의 콜을 확인한 후에는 이미 유격수 박성한이 길을 막고 있어서 태그 아웃될 가능성이 높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저 끝내기 안타를 쳤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1루에 있던 안재석은 2루로 뛰었어야 했다. 하지만 끝내기 안타라고 굳게 믿은 안재석은 2루 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1루로 돌아갔다. 그 사이 박성한은 정수빈을 태그 아웃하고 안재석까지 포스아웃 시켰다. 3루 주자 김재호가 홈으로 들어왔다 하더라도 1,2루 주자 중 한 명이라도 베이스를 밟아야 득점이 인정되기 때문에, 아무도 베이스를 밟지 않은 두산은 본헤드 플레이(Bonehead play·잘못된 판단이나 미숙한 상황 대처로 발생하는 실책)로 역전승을 내주었다.



본인의 첫 끝내기 안타가 좌익수 앞 병살타로 변해버린 후 멘붕에 빠진 조수행 선수의 안타까운 뒷모습.



선수들도 전문가들도 보기 힘든 경우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수들의 잘못이 사라지진 않는다. 1,2루 주자가 타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3루심 심판 콜을 제대로 보았다면, 또는 1, 3루 주루 코치의 사인을 확인했다면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수행은 자신의 첫 끝내기 안타가 좌익수 앞 병살타로 둔갑한 이후 큰 충격에 빠졌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는 이후 진행된 12회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며 역전승의 점수를 내주었다. 멘탈이 나가더라도 남은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데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날 두산 선수들은 정말이지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1점으로 경기의 승패가 달라지는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승리의 기쁨에 취해 경기를 끝까지 집중하지 않은 나머지 이렇게 쓰디쓴 패배를 하고 말았다.



스포츠든 일이든 가장 중요한 건 태도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하기까지의 과정이 오만하거나 실수를 한 후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철저히 돌아봐야 한다. 실수를 하건 안하건 평상시에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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