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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실 Sep 21. 2022

한 분야의 'Key Man'은 뭐가 다를까

본격적인 시즌 준비의 세 번째 단계, 프로필 촬영



그 해의 캐치프레이즈를 정하면 시즌 *키 비주얼을 만들어야 한다. 키 비주얼(Key Visual)은 주로 광고에서 쓰이는 용어로, TV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한 화면을 뜻한다. 이를 스포츠에 적용하면 전 선수 혹은 메인 선수들을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디자인한 포스터와 같다. 주로 관람객들이 출입하는 경기장의 메인 출입구나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곳에 걸린다.



KB스타즈 여자프로농구단 2021-2022 시즌 키 비주얼
2021-2022 시즌 키 비주얼이 걸린 KB스타즈 청주체육관 전경


키 비주얼은 경기 중 찍은 역동적인 컷과 팔짱을 끼거나 공을 들고 있는 정적인 컷을 섞어서 활용한다. 선수들의 등 번호와 포지션 같은 프로필이 정해지면 유니폼을 입고 그 해 쓸 사진을 찍는데, 이를 '프로필 촬영'이라고 한다. 프로필 촬영에서는 각 협회를 비롯한 모든 매체와 키 비주얼에 쓰일 기본 사진을 찍는다. 키 비주얼에 필요하다 생각이 들면 드리블을 하거나 슛을 넣는 컷을 찍기도 하고, 각종 이벤트 게시물을 위해 선수들이 한복이나 교복, 산타복을 입고 이벤트 컷(크리스마스, 새해/추석, 수능 등)을 찍기도 한다.



프로필 촬영은 하루 반나절 이상 찍는 경우가 많다. 우리 회사가 맡은 구단들은 부산, 청주, 인천, 용인, 잠실 등 전국 각지에 분포하고 있어서 프로필 촬영을 찍는 8~9월에는 체력을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선수들이 훈련을 해서 멍하니 시간을 죽여야 할 때는 더 힘들다. 스트레이트로 한 번에 찍으면 나중에 몰아서 힘들고 말지만, 시간이 붕 떠서 중간에 쉬게 되면 피로가 훨씬 더 밀려오기 때문이다.



한 선수당 홈과 원정 유니폼 두 벌씩 기본 프로필 촬영에 이벤트 컷과 포지션별/전선수 단체, 사복 촬영까지 하려면 주어진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헤어/메이크업뿐만 아니라 다른 업체에서 진행하는 영상 촬영도 있어서 타임 테이블을 미리 짜두는 게 중요하다.


한 선수당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5분 내에 40개에 달하는 포즈를 찍어야 해서 우리는 시간 내에 찍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모든 포즈는 무표정 1컷과 웃는 표정 1컷, 딱 2가지 컷씩 진행하며, 디렉팅 시 선수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동작을 똑같이 따라 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수들이 우왕좌왕할 겨를 없이 빠르게 촬영을 마칠 수 있다.




올해 KB스타즈 프로필 촬영 당시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디렉팅을 하는 나. 최근 올라온 KB스타즈 유튜브 영상에 담겼다ㅎㅎ






프로필 촬영은 스탭인 우리들 뿐만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고된 일정이다. 하루에 프로필 촬영과 기타 이벤트 촬영, 영상 촬영까지 다 진행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프로필 촬영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올해 초, 코로나19가 조금 잠잠해져 두산 베어스 선수단 전원이 오랜만에 프로필 촬영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은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 중순으로 눈이 펑펑 내렸다. 팬들로 가득 차던 잠실 종합운동장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고, 나는 눈을 보자마자 하루 종일 진행될 촬영의 막막함은 잠시 잊고 아이처럼 사진을 찍었다.





신인 선수들 14명과 투수/야수 포함 35명, 코칭스텝 23명까지 장장 72명을 찍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두산 베어스의 경우는 구단에서 고용한 포토그래퍼가 계셔서 우리가 따로 디렉팅을 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모든 선수들이 제대로 촬영을 했는지 체크하는 게 중요했다. 또한, 두산 베어스에서는 매년 팬들을 위한 잡지 형태의 '팬북'을 만드는데, 내게는 팬북에 들어갈 콘텐츠용 질문지를 선수들에게 드리고 답변을 받는 것이 또 다른 미션이었다.



신인 선수들에게는 30가지의 짧은 질문으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30문 30 답'을, 당시 유행하던 스우파(스트릿 우먼 파이터) 속 리더들의 각기 다른 리더십을 설명하며 나는 어떤 성향의 리더에 가까운지 답변하는 '베어스 리더 성향 테스트'를, 영화 해리포터의 네 개의 기숙사 성향 테스트인 '베그와트 기숙사 테스트' 질문지를 해당하는 선수에게 드렸다.



내가 기획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드린 질문지



선수들이 대기실에 올 때마다 나는 질문지를 드리고 회수하기를 반복했다. 입사 후 두산 베어스 프로필 촬영이 처음이었는데 어떤 선수가 프로필 촬영을 했는지 체크하고, 질문도 받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한 선수가 답변의 이유를 안 쓴 걸 확인했다. 콘텐츠로 쓸 내용인데 답변이 없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내서 다가갔다.


"저, 이게 팬북 콘텐츠로 써야 하다 보니 이유를 조금 적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그 선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쓸 말이 없는데"


그 말에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뭐라도 내용을 건져야겠다는 생각에 더 다가갔다.


"그래도 한 문장이라도 써주세요! 이유가 없으면 내용이 빈약해 보여서요..."


그러자 그 선수는 정말 몇 글자만 쓰고 휙 사라졌다. 선수들도 계속 이어지는 대기 시간과 촬영에 지치는 걸 알지만, 열심히 기획한 콘텐츠에 성의 없이 대응하는 그 선수를 보며 황망한 마음이 들었다. 팬들에게 조금이라도 선수들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기획한 콘텐츠인데 그동안 고생한 내 노력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울적해 있을 때 밝은 목소리의 한 선수가 나타났다.  


"오~ 스우파~!"


그 선수는 바로 두산 베어스의 박보검이라 불리는 '허경민' 선수였다. 허경민 선수는 본인이 어떤 성향의 리더인지 심각히 고민하다 이유를 길게 적어 내려갔다. 답변을 작성하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그를 보며 좀 전의 선수와 비교가 되었다. 평소에도 팀이 어려울 때마다 호수비와 안타로 두산 베어스의 'Key Man'이 된 그를 보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냐고 여쭤보았다. 그러자 허경민 선수는 "아유 당연히 되죠."라며 흔쾌히 사진을 찍어 주었다. 처음 보는 스탭임에도 친절히 대응하고 질문지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허경민 선수를 보며 짧은 순간이지만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순간 허경민 선수가 왜 두산 베어스의 '키맨'이며 미담이 끊이지 않는지 알았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라 불리는 사람은 매사에 성실하며 진심을 다한다. 본업에 대한 노력은 당연하거니와 작디작은 일까지 허투루 넘기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귀함을 알고, 그들의 노력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실력이 좋다고 모두가 최고가 될 수는 없다. 어느 한 분야에서 대체 불가한 'Key Man'은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라는 것을 허경민 선수를 통해 배웠다.



지나가는 스탭 중 한 명이었을 나에게 따스하게 인사해주신 허경민 선수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나도 내가 속한 분야에서 key Man이 될 수 있도록 항상 성실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아야지.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나를 보며 어느 누군가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꿈을 꾸기를 바란다.



두산 베어스의 빛과 소금이자 허보검 선수! 앞으로도 부상 없이 행복하게 무탈히 야구하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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