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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실 Oct 05. 2022

내 삶의 스토브리그를 끝내며

인생의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자세


2020년 11월, 야구를 하나도 몰랐던 내가 두산 베어스라는 구단을 클라이언트로 접하게 되면서 당해 인기리에 종영했던 '스토브리그'를 보게 되었다.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뜻하는 말로, 선수들의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이때 스토브를 둘러싸고 팬들이 평판을 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드라마도 프로야구가 개막하기 전 비시즌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토브리그는 소년 만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띤다. 팬들의 눈물마저 마른 프로야구 꼴찌팀 '드림즈'에 맡은 구단마다 꼴찌팀을 1위로 만드는 '백승수 단장'이 부임하면서 팀을 한국 시리즈까지 이끄는 이야기다. 백승수 단장은 다소 경직되고 사무적인 태도로 구단을 운영하는 듯 보이지만, 여러 데이터와 통찰력을 기반으로 구단과 내부 직원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구단에 득이 되는 일을 위해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반발심이 강하던 기존 사람들도 그의 내면을 알게 되면서 차츰 백승수 단장에게 스며들었다. 특히 이제는 꼴찌가 당연하다는 듯 비리를 저지르거나 월급 루팡만 하던 프런트들이 저마다 각성해 열정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만년 꼴등이던 팀이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 악착같이 노력해 1등을 하는 이야기, 모종의 이유로 슬럼프에 빠져 있다가 본인의 한계를 뚫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간 선수, 1 득점을 내는 그 찰나를 위해 몇 년의 재활을 견디고 일어선 부상 선수,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던 라이벌을 끝내 이긴 선수 등 등... 어쩌면 뻔하디 뻔한 스토리여도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내 이뤄낼 수 있다는, 'Impossible is nothing의 희망' 말이다.



스토브리그를 며칠 동안 밤새 보면서 내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산 베어스의 *팬북(팬들을 위한 매거진) 기획이라는 과업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2년마다 새로운 구단에 부임하는 백승수 단장처럼 두산 베어스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정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시즌 동안의 경기 흐름을 보며 어떤 선수가 잘했고, 어떤 선수가 두각을 나타냈는지 이슈를 살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요 선수 인터뷰와 팬들이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콘텐츠를 여러 개 기획했다.



며칠 뒤, 프런트분들과 팬북 미팅을 하기 위해 팀장님과 함께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갔다. 야구장 자체도 안 가봤던 당시 구장 내부에 두산 베어스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사무실을 보자 가슴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었다. 프런트 직원분들과 첫인사를 나눈 후 바로 기획서를 보여드렸다. 최대한 야구라는 종목과 두산 베어스라는 구단에 익숙해지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기획이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프런트분들 중 엄마 곰이라고 불리는 푸근한 인상의 리액션이 좋으신 과장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혹시 저희 구단 팬이세요?
저희 구단을 잘 알고 계시는데요?
야구를 원래 좋아하시나 봐요.


아무것도 모르는 무에서 시작해 구단과 친밀해지는 과정을 통해 유를 창조해낸 그때, 내가 들인 노력이 성공의 결실을 맺은 그때가 내가 야구에, 두산 베어스에 빠지게 된 순간이었다.



설렘과 긴장감이 공존했던 두산 베어스 사무실과 내가 기획한 2021년 팬북 보도자료






스포츠라는 낯선 세계에 불시착한 나는 2년 반 동안 물밑에서 쉼 없이 발장구를 쳤다. 내가 모르는 구단, 모르는 종목이 계속 나왔지만, 그때마다 내 무지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은 자세로 구단을 더욱 조사하고 파고들었다. 그렇게 모르던 구단은 점점 익숙한 구단으로, 최종적으로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 되었다.



인생은 스포츠를 닮았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다가도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모든 악재가 다 겹친 듯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난도 언젠가는 사라질 때도 있다. 스포츠를 통해 내가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끝까지 임하는 끈기와 도전 정신, 설령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어도 다음을 기약하며 새 시즌을 준비하며 일희일비하지 않는 마음을 배웠다.



백승수 단장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드림즈를 강력한 우승 후보로 만든다. 그러나 모기업의 방해로 드림즈가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백승수 단장은 다른 기업체 대표를 찾아가 PT를 한다. 단장의 말에 설득돼 드림즈를 인수하기로 결정한 대표는 한 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바로, 백승수 단장을 해임하는 조건이었다. 야구단에 오기까지 여러 구단을 거쳐간 이력 때문에 주주들의 반발을 피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자리를 보존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대표의 말에 백승수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날이 따뜻해진 걸 보면 단장의 시간은 지났습니다.
이제 감독과 선수들이 잘하겠죠.
대표님 덕분에 제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백승수 단장의 저 말은 어떤 말보다 가슴에 박혔다. 비시즌 동안 드림즈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애정을 쏟아부었던 단장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구단에 대한 애정이 클 텐데 담담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아, 끝까지 가 보았기에 더 이상 미련이 없구나.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백승수 단장의 뒷모습에서 후회 없이 노력하고 애쓴 사람의 개운하고 기쁜 마음이 느껴졌다.



백승수 단장의 빠른 판단력과 구단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로는 승부수를 던질 줄 아는 과감한 도전 정신은 드림즈를 정상으로 일으켜 세우는데 대단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함께 머리를 맞댈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할 드림즈 프런트들, 코칭스태프, 그리고 이를 선수단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면 드림즈는 최강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해이해지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백승수 단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드림즈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백승수 단장이 해임된 이후 또 다른 문을 열고 새로운 항해를 나서는 것처럼, 나의 항해도 언젠가 육지가 보일 것이라 믿는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같이 헤쳐나갈 사람들이 옆에 있다는 걸 알기에 두렵지 않다.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는 서로 도울 거니까. 끝까지 서로를 믿고 나아가자!



스토브리그 마지막 씬이 끝난 후 나타나는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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