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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NEST RABBIT Sep 06. 2022

희망이 고문이 되는 시점.

두 번째 이야기. 희망이 고문이 되는 시점.


희망이 고문이 되는 시점




공통의 분모가 때로는 독이 되어 이해라는 명목 하에. 

준비되지 못한 분자들을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한다. 


희망이 고문이 되는 시점에서. 

냉정하게 공통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 


아픔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대여 극단의 상황에 감정에 치우쳐, 자신의 삶을 소모하지 말게나. 
우리의 인생이 어찌 직선이어야만 하겠는가. 

굽이진 인생길을 직선으로만 가려하면,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야. 

멀리 보지 말고, 길만 보고 가게나. 
길이 인도하는 대로. 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보게나.




"건물까지 올리신다는 분이 어쩌다 이렇게 되셨습니까?"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니죠. 그건 이겨낼 수 있는 문제이며 선택이죠."

"어찌 사람이 상황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요."



날이면 날마다. 
나는 두 팔 벌려 이스라엘을 불렀건만,

이런 수고에도 내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도 나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위로를 바라는 인생의 사치는 부리지 않은지 오래다.


하지만 과거의 목표와 포부가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조롱거리가 되다니.

좋은 상황과 좋지 않은 상황을 겪어내는 사람은 결국 당사자인데.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사람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침묵은 금이다.>라는 두 문장의 조합이 날 살게 한다.


그래서 난 어찌 보면, 다른 이의 인생을 논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내려 발버둥 치고 있으니.

고통의 시간을 겪어내는 사람이 살아내려 발버둥 치고 있으니.


그 움직임이 잘못되었다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죽음을 경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세상에서 나의 곁의 사람이 죽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차라리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아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이 동일 시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아의 죽음은

언제든 환경이라는 동반자를 만나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여 살아만 있어라,
부디 살아만 있어라



그대가 그토록 하찮게 여긴 1분이라는 시간은 그토록 살고자 했던 죽은 이가 꿈꿨던 희망이었다.

모든 이들의 삶이 정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산다고 내 삶까지 그렇게 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꿈과 이상을 꿈꾸고, 그 꿈과 이상에 자신이 갇혀 현재를 불행해한다. 

현재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 현재만이 우리를 존재한 게 한다. 

그것으로 되었다. 현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자전적 심리치유 소설.>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기에 너무 혼잡하고 복잡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나 실험해 봐야겠다.

인생의 굴레에서 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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