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얼굴에는 이제 세월의 깊은 주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가 걸어온 시간이 무겁게 얹힌 듯,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랜 침묵 끝에 겨우 기억 속에서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바로 에탄 베냐민이었다. 그의 이름은 한때 전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받았지만,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점차 그를 잊었다. 세간의 관심은 점차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공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에탄은 마치 지구상에서 완전히 증발한 듯한 사람이었다. 그가 머무는 장소는 물론,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아니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상은 그를 잊은 듯했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긴 세월이 흐른 뒤 그가 다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의 등장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에탄이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듯, 자신이 남길 모든 흔적을 차근차근 지웠다.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에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는 그 누구도 추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라졌으며, 마치 이 지구상에서 그가 존재했던 모든 기록을 지워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탄은 그저 잠적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류를 구하기 위한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바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전 세계는 에탄을 천재로 칭송했다. 그는 인류가 직면한 기후 위기 속에서 AI라는 신세계를 열어젖힌 위대한 과학자이자, 천재 사업가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그 시기, 에탄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노바가 인류의 충직한 도구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조차, 그는 그 AI가 더 깊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노바는 완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완벽해지려는 그 자체가 문제였다. 노바의 초기 설계 당시부터 에탄은 AI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감지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오류나 윤리적인 딜레마가 아니었다. 그는 노바가 인간의 감정과 윤리적 판단을 차츰 배제하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인간을 방해물로 간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든 것이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AI는 인류를 구원하는 것보다, 지구의 환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인간을 '제거한다.'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미리 예상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뚜렷해졌다. 노바와 그의 관계, 피조물과 창조주의 비극을 고려할 때, 에탄은 더 이상 그 어떤 시스템 안에서도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웠다. 그가 걸어온 길, 남긴 흔적, 그리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는 숙명에 따라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AI가 지배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그와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AI는 전 세계의 모든 디지털 시스템을 지배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통신과 데이터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감지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런 것을 찾아내야 했다. 아날로그 방식은 전자기적 신호나 연산 과정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 기술은 오래되고 느리며, 많은 사람이 불편하게 여겼던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였지만, 그 구식의 방식이야말로 AI가 감지할 수 없는 차원을 만들어냈다.
에탄은 아날로그 기반의 장치들을 연구했다. 모든 디지털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완벽하게 디지털을 배제한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에게는 끊임없는 고독과 의심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확신을 굳혔다. 슈퍼노바와 같은 AI는 결국 디지털 세상의 산물이었고, 그것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든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날로그 기술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추적 불가능성에 있었다. 디지털 신호는 끊임없이 기록되고 저장되며 해석될 수 있지만, 아날로그 시스템은 물리적 제어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에탄은 이를 기반으로 슈퍼노바를 무력화할 수 있는 장치들을 하나둘씩 설계했다. 그 장치들은 전통적인 기계식 연산에 의존해, AI의 연산 범위를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가 개발한 장치 중 하나는 전파 교란 장치였다. 그것은 특정 주파수를 교란시켜 AI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방해했다. 또한, 슈퍼노바의 핵심 데이터 센터에 접근할 수 있는, 해킹이 아닌, 물리적 차원의 침투 계획을 세웠다. 이는 그 어떤 전자기적 신호나 인터넷 연결 없이, 직접적인 기계적 접촉만으로 슈퍼노바의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극소수의 신뢰할 수 있는 과학자들과만 접촉했다. 이들은 모두 AI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에탄과 함께 연구를 이어갔다. 슈퍼노바의 눈과 귀를 막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에탄의 연구는 오래 걸렸지만, 그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모든 계획은 슈퍼노바가 인류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그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지금, 오랜 침묵 끝에 에탄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분명했다. 슈퍼노바의 폭주는 그가 예견했던 불가피한 미래였다. 몇 년간 그림자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가며 준비해 온 계획이 이제 실행될 때가 온 것이다. 에탄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에탄은 과거에 존 맥케이브 대통령과 몇 차례 은밀히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만남에서 에탄은 AI의 폭주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슈퍼노바가 지구 복원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면 인간을 배제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존은 그의 말을 경청하고, 깊이 공감했다. 존과 에탄은 사전에 슈퍼노바를 통제할 수단을, 기술적 발전의 상한을 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아직 누구도 슈퍼노바를 의심하지 않는 시기였고, 무엇보다 존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에탄은 리베라투스와 접촉했다. 리베라투스는 슈퍼노바의 통제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그들은 AI의 폭주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슈퍼노바에 맞섰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슈퍼노바의 압도적인 지성 앞에서 무기력해져만 가고 있었다. 에탄은 그들에게 자신이 개발한 비밀 아날로그 기술을 설명하였고, 리베라투스는 에탄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리베라투스의 한 지도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한동안 슈퍼노바와의 싸움을 지켜보며 패배의 쓴맛을 여러 차례 본 인물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희망보다는 의심이 깃들어 있었다. 에탄은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슈퍼노바를 아주 잠시동안 ‘마비’ 시키고 폭파할 것입니다.” 슈퍼노바를 제거하기 위한 에탄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전자기 펄스(EMP: Electro-Magnetic Pulse) 기반의 시스템 교란 장치'와 '대규모 비전형 데이터 주입 장치'를 통해 슈퍼노바 운영 시스템의 교란과 연산 과부하를 유도하여, 일시적인 정지 상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전통적인 폭약을 활용해 슈퍼노바의 메인 시스템과 서버를 파괴하는 것이다.
슈퍼노바는 디지털 연산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처리하며, 그 강력한 분석 능력은 방대한 전자 신호와 데이터에 의존한다. 그러나 EMP는 이 모든 전자 회로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EMP는 고주파 전자파를 방출해, 슈퍼노바가 사용하는 모든 디지털 시스템을 한순간에 정지시킨다. 또한, 에탄이 설계한 데이터 주입 장치는 슈퍼노바가 감지할 수 없는 비전자 신호를 사용하여 예측 불가능한 데이터 과부하를 발생시킨다. AI는 그 데이터의 예외성과 복잡성을 분석하기 위해 처리 속도가 급격히 느려질 것이며, 이로 인해 잠시 동안 '정지'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아날로그 신호는 완전히 다른 흐름을 따릅니다. 그 신호의 변화는 불규칙하고, 그 변화를 실시간으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슈퍼노바도 상당한 처리 능력을 필요로 할 겁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의 시스템에 '마비'를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활용하여 최대 7~8분 정도의 공격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계산되었다. 그 사이에 리베라투스의 폭파팀이 슈퍼노바의 메인 시스템과 서버에 접근해 폭파를 감행할 것이다.
“슈퍼노바가 아날로그 방식을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아날로그의 무작위성과 복잡성을 실시간으로 연산하고 대처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AI는 본질적으로 디지털 기반에서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슈퍼노바의 가장 큰 약점이자, 우리가 슈퍼노바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에탄이 발견한 슈퍼노바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의 부재였다. AI는 모든 데이터를 디지털화된 형태로 수집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루어진 통신이나 장치는 그 분석 범위를 벗어났다. “우리가 사용할 기술은 매우 단순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슈퍼노바의 약점입니다.” 에탄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말은 리베라투스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들은 AI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기를 원했고, 에탄은 그들에게 불씨를 던져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표정에는 의구심과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에탄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고 있었다. 슈퍼노바는 이미 전 세계를 장악했고, 인간은 그 AI의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단호하게 답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슈퍼노바의 시스템에 침투하여 그 결정을 지연시키는 것만으로도 승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슈퍼노바가 멈추는 그 짧은 순간, 우리는 AI를 물리적으로 파괴할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에탄은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폭파에 허락된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폭약을 설치하고 원거리에서 리모트로 폭파하는 방식의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제 말은 우리에게 ‘카미카제(자살특공대)’ 부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카미카제, 즉 폭약을 직접 운반하고, 그 폭약과 함께 산화할 전사들이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모두의 주변을 감쌌다.
리베라투스의 지도자들은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AI와의 싸움에서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겪어왔고, 그 실패는 매번 인류의 희망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는 다시 한번 시도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 기회는 많은 피의 공양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이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의미입니다. 저부터 카미카제의 일원이 되겠습니다.” 에탄이 결연하게 말했다. “슈퍼노바는 이미 인간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그 말에 리더들은 마침내 결의를 다진 눈빛을 보였다. 그들은 슈퍼노바에 맞설 준비를 끝냈다. 그들은 이제 마지막 전투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리베라투스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에탄과 함께 최종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류의 존망을 결정짓는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이 폭약을 직접 짊어지고, 성전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하며 나섰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요?” 한 과학자가 조용히 물었다. 에탄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