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스미스는 연구실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스턴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흐릿하고 무거웠다.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바람은 차갑고 매섭게 불어왔다. 그녀는 손에 들린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갔지만,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미지근하고 쓴맛만 남아 있었다.
연구실로 천천히 돌아가며 그녀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쌓인 논문과 데이터들을 흘끗 쳐다봤다. 컴퓨터 화면은 멈추지 않고 숫자와 그래프를 계속 갱신하고 있었다. 그 모든 숫자와 그래프는 그녀가 대학생 시절부터 시공간에 대해 연구하며 수집한 결과들이었다. 그녀는 이 차가운 숫자들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2035년의 보스턴은 혼란 속에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연이어 닥친 폭풍과 홍수는 도시를 휘몰아쳤고, 사람들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지쳐가고 있었다. 레이첼은 매일 아침 뉴스에서 들려오는 기상 경보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예전에는 비가 내리면 평온함과 차분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녀도 비에 관한 연작시를 쓰기도 했었다.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가사의 노래도 많았고. 이제는 비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불안이 앞섰다.
거리의 나무들은 폭풍에 의해 뿌리가 드러나 있었고, 강풍이 불 때마다 지붕이 뜯겨나간 건물들이 늘어갔다. 사람들은 우산을 뒤집어쓰고 비틀거렸고, 전력 공급이 자주 끊겨 불편을 겪었다. 도시의 일상은 날씨의 변덕에 따라 휘둘렸고, 레이첼은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늘 데이터 분석에 몰두하며, 지구의 긴 역사 속에서 기후 변화의 패턴을 파악하려 했지만, 그래서 거기서 미래의 희망을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음모론 따위는 음모론일 뿐이다. 이제는 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 보이는 날들의 연속이다. 모델들은 점점 더 비관적인 결과를 내놓았고, 미래의 예측 그래프는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제는 모두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기후 변화는 이제 되돌릴 수 없고 지구는 파국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어떤 소녀가 썼다는 ‘죽어가는 지구’가 이제 더 맞는 표현이다. 레이첼은 그래프의 끝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안 돼." 그녀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과학자로서 그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첼은 연구실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의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상이 아닌,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진지한 시도였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 변화의 시작점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론적 근거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녀의 이론에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타임머신의 복잡한 수식과 변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고, 심지어 그것이 가능해져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레이첼은 동료들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레이첼, 너를 이제부터 미스 노이만이라고 불러야겠다.” 중학교 때 과학 선생님이 폰 노이만의 이름을 따 그녀를 미스 노이만으로 부른 이후 줄곧 그녀는 미스 노이만으로 통했다. 모두 그녀를 천재라고 불렀고 그녀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확신에 찬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녀 자신도 미스 노이만이라 불리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MIT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당연하다는 듯 최연소 종신교수가 되었다. 젊은 과학자에게 주는 상을 휩쓸었다. 미래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양자 얽힘’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스타 과학자였던 그녀가 갑자기 ‘타임머신’을 연구한다고 하자 많은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그들의 실망은 당연했고 가끔은 분노에 가깝기도 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한 나머지 뇌가 이상해졌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미스 노이만은 폰 노이만과 달리 더 이상 인류에게 기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레이첼, 이건 마치 SF 영화 같아.” 오랜 기간 친구였던 한 동료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임머신이라니, 그건 그저 픽션일 뿐이야.”
레이첼은 잠시 입을 다물고 동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 법칙은, 이론적으로 시공간의 왜곡을 가능하게 해요. 물론, 그게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어도 시도해볼 수 있잖아요. 시간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많지 않아요.”
그런 말을 들은 상대방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잠시 말문을 닫고 동료들과의 거리를 느꼈다. 그들과의 대화는 항상 이렇게 끝나곤 했다. 그들은 레이첼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갔다.
그녀는 매일 아침 연구실에 들어와 어지럽게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며, 각종 실험을 반복했다. 구석에 있는 컴퓨터의 스크린에는 미래의 기후 예측 모델이 펼쳐져 있었고, 그 그래프들은 점점 더 불길한 곡선을 그려가고 있었다. 날씨가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면서, 기후 재앙의 현실성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레이첼은 그 모든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고, 그 경고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후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기술로는 이제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고, 레이첼은 그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다.
그날도 레이첼은 연구실에서 늦은 밤까지 남아 있었다. 창밖에서는 강풍이 불어왔고,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의 계산에 따르면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시간 여행에 착수하는 시점보다 기후 변화의 심화에 따라 그녀가 특정한 사고에 의해 사망하는 시점이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지식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꼭 그녀가 아니어도 된다.
레이첼은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임머신의 이론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고,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었고, 현실적으로 실현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 에너지는 소형 블랙홀이나 초고온 플라스마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로 컸으며, 모든 과정은 수없이 복잡한 수식과 매트릭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미션이었다.
레이첼은 그 가능성에 매달렸다. 어떤 동기로 그녀가 시간 여행에 매달리게 되었는지 사실 그녀 자신도 잘 모른다. 폭풍우를 피해 집에서 지내던 어느 날, 엄마가 돌아가신 그날 밤, 어쩌면 과거로 돌아가면, 지금의 절망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를 붙잡았던 적이 있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잠시 눈을 감았다. 연구실의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고, 레이첼은 그 속에서 무언가를 결심하는 듯했다. 과학자로서 그녀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늘 갈등했고, 타임머신은 그 경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몇 달 후, 레이첼은 타임머신의 이론을 보스턴의 과학자들에게 발표했다. 그녀는 데이터와 수식을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론적 설명을 마치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많은 동료에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유망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설명은 당장은 이론적 오류가 없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뢰했고 사랑했던 레이첼이기에 그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는 것뿐이다. 하지만 레이첼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연구가 단순한 이론을 넘어 실제로 실행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녀는 회의장을 나와 보스턴의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강풍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레이첼은 그들 모두가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있기를 바랐다. 그저 이 지구의 미래를 위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를.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첼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보스턴의 거리에는 여전히 불빛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제각각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레이첼은 타임머신의 프로토타입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수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 기계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녀의 손끝에 전해졌고, 그녀는 그 속에서 희망을 느꼈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 순간을 붙잡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의 지원이 필요하다. 혼자 했던 연구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그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고 나아가 그녀를 지지하고 지원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다행인 건 지구가 완전히 죽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날 밤 많은 과학자가 술을 나눠 마시며 레이첼을 걱정하고 비웃는 대화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미스 노이만의 죽음을 애도하며” 라고 건배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