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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Th on view Jan 26. 2024

흔적으로 지은 덩어리

정현 개인전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구 벨기에 영사관으로 건립되어 건축물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인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미술관 전시장의 기능을 고려하면 결코 쉽지 않은 공간이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으로 지정돼 그림을 걸기 위한 그 흔한 못질 하나 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회현동 부지에서 현재의 남현동으로 이축 후 복원된, 오랜 역사를 머금은 공간인 만큼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우아함을 갖추고 있어, 시간이 밴 작품과 어우러질 때 작품의 매력도가 한층 가미되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2023년 6월 들어서 1층 전시실에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각가 권진규의 상설전시실 〈권진규의 집〉에 이어 한국 조각사에 독보적인 획을 그은 또 다른 조각가의 작업세계가 이 멋진 건물의 2층 전시실과 야외 정원을 한시적으로 채우고 있다. 정현 작가의 개인전 〈덩어리〉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매체의 물성을 극대화하는 작가의 조형적 특징과 더불어, 철길의 침목, 고철, 철거된 한옥의 파편, 불에 타 재가 된 나무, 폐자재 등 쓸모를 다한 재료가 살아내고 견뎌온 ‘덩어리진 시간’을 두루 의미한다. 


정현 작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내 작업은 격렬하게 폭발하고 발산 뒤에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들여 더 조용해지고 담담하며,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것이고, 어디서 왔나,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 정현


1956년생인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 조소과를 거쳐 30세가 되던 해 프랑스 유학길에 나서, 파리 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작품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주의적 표현에 기반을 둔 당시 작품에 대해 “철학적 사유나 시적 감수성이 결여된 작품”이라는 냉철한 평을 받으면서다. 작가는 이 시기를 겪으며 사물을 대하는 방법과 태도, 작업하는 자세를 배우며, 인간과 사물에 내재한 본성을 탐구하고,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새로움을 발견해 왔다. 


정현 개인전 《덩어리》 전시 전경 사진 임장활,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적으로 정현 작가의 작품이 각인된 계기는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을 메우던 “서 있는 사람” 전시다. 2015년 11월 파리 시내 여러 곳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테러로 무고한 시민 130명이 숨진 후 얼마 안 있어 개최된 전시에서는 더 이상 쓰임을 잃어버린 철도 침목을 잘라 만든 작품 50여 점이 흡사 땅의 정령처럼 들어섰다. 수만 번 이상 지나갔을 육중한 기차의 무게, 해와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묵묵히 견뎌온 세월을 떠나보낸 뒤 우뚝 서 있는 투박하지만 우직한 그 모습은 비극을 겪은 후에도 여전히 돌아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시민에게 침묵 속에서 위안을 건넸다. 국내에서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침목을 재료 삼은 설치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박물관 지하 가장 깊숙한 곳을 비추는 하늘 아래 붉은 벽돌로 켜켜이 뒤덮인 광장에 44인의 순교자를 기리는 〈서 있는 사람들〉로 재탄생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현 개인전 《덩어리》 전시 전경 사진 임장활,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이번 개인전은 작가의 유학 시절 이후인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조형적 흐름을 살피면서 ‘점유하는 돌’, ‘얼굴들’, ‘누워있는 사람’, ‘순간의 포착’, ‘더께: 일의 흔적’ 순으로 전개된다. 2022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의 기획전 〈시간의 초상: 정현〉 이후 1여 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작가는 손에 익은 습관과 잡념을 비워내 백지상태로 시작하고자 했다. 2023년 초, 여수 장도에서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작품 구상보다는 걷기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파도에 마모된 돌과 거친 질감이 살아있는 돌을 수집했다. 

이토록 평범한 소재를 3D 스캐닝 기술을 통해 확대하고 가볍기 그지없는 스티로폼으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석유 찌꺼기인 콜타르로 채색하고,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등 ‘비전통적인’ 재료를 활용했다. 세월을 집적해 온, 시간의 결이 응축된 재료로 대표적인 침목 작품은 부재하지만(아카이브룸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자연 그리고 시간과 협업해 고안해 낸 녹드로잉은 소리 없는 탄성을 자아낸다. 흰 철판에 의도적으로 흠집을 낸 뒤 비 오는 날에 노출시켜 녹이 흘러내리도록 의도한 작품은 완성하는 데에만 5-6년이 걸렸다. "나는 흠집만 냈을 뿐 자연과 시간이 그려준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현대미술에서 시간의 개입에 대해 고찰해보게 한다. 


그간 미공개된 드로잉 작품 역시 조각과 더불어 전시된다. 작가에게 드로잉은 조각을 위한 밑그림이 아닌, 순간 쏟아내는 즉각적인 감정의 포착이다. “최초의 감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메모를 하듯, 일기를 쓰듯 드로잉을 남긴다”는 작가는 “조각은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데 몇 주씩 걸리지만 그사이에 튀어나오는 많은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을 담아내기에 드로잉이 적절했다”고 덧붙인다. 


“철학적 사유나 시적 감수성이 결여된 작품”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 헤매 온 조각가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잘 헤매기’를 목표로 ‘하찮은 것들의 하찮지 않음’을 꾸준히 관찰하고 본질에 천착하는 작품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장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2층 전시실 및 야외정원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기간 2023.12.20 - 2024.03.17


엘르 코리아 닷컴 #요즘전시 칼럼(2024.01.16 게재) 기고를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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