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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ft. 베를린 일상에서 나만의 스트레스 풀기)

by 지구외계인


나는 걷는다.

아주 많-이, 오-랜 시간을 걷는다.


짧게는 두 시간 정도부터, 길게는 쉬지 않고 4시간, 5시간도 걷는다.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정도 걷는 건 예삿일이라, 보통 사람들 걷는 것보다 많이 걷는다고 생각을 못 했는데,

나는 이것을 '산책'이라 칭하지만, 나와 함께 산책을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산책이라 여기지는 않더라.


이는 스트레스 혹은 생각이 많을수록 더 오래, 더 많이 걷는다.

걷으며, 음악을 듣거나,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하고, 주변을 보기도 하며-

머리를 비우고 환기 시키는 일종의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돌파구인지도...


혹자는 이를 듣고, 이는 일종의 자학인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EC%8A%A4%ED%81%AC%EB%A6%B0%EC%83%B7_2025-07-31_13.19.08.png?type=w773 (c) Freepik




원래도 잘 걸었지만, 이에 불을 붙인 건 코로나 덕이다.


원래도 산책하는 걸 좋아하고, 혼자 여행할 때도 혼자 몇 시간씩이나 쉬지 않고 잘 걸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에 불이 붙은 건 코로나 덕이 아닐까 싶다.


록다운이 시작되고, 집안에 본의 아니게 갇혀서 생활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물론 이때도 개인이 우리보다 우선시 되는 독일 사회에서는 집 앞의 산책이라는 명목으로 하루에 몇 번씩 밖에 나가는 이들이 많았다. (정부에서도 산책 명목 혹은 생존을 위한 쇼핑을 나가는 것은 집 근처에 한 해 제한적으로 허용했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다-라고 판단한 나는 처음 한동안은 집에서 칩거 생활 아닌 칩거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고, 규율이 완화되며 밖으로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1차적으로는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마트에 가고, 일부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마트로 가 쇼핑 겸 산책을 했던 것.

그러다가 점점 더 규율이 완화- 하지만 아직도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때쯤부터 차츰 산책을 조금 더, 더 길게-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주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주변의 공원을 걷거나, 정처 없이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도 가라앉고, 머리가 '환기'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게 어느 순간부터 루틴이 되었고, 웬만한 거리를 걷고, 딱히 볼일이 없어도 밖에 나가 나만의 산책을 즐기는 것이 일상이자 취미가 되었다.




베를린은 걷기 아주 좋은 도시이다.


파리나 런던처럼 시내 길이 좁지도 않고, 번화가를 한 블록만 벗어나도 주택가는 사람도 많이 없고 조용한 편이다.

어디든 나무와 공원이 많고, 조용한 길을 걷다 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일도 너무 일상적이다.

도시가 참 푸르르다.

좋게 말하면 자연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거리나 공원의 조경이 멋을 내는 일이 드물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공공장소나 공원의 경우 관리는 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기본적인 관리만 하는 듯하다.

베를린에서 제일 큰 공원 중 하나의 티어가르텐의 경우,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 이곳이 공원인지 숲인지 헷갈릴 정도의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베를린은 기본적으로 어느 나라의 수도치고는 사람이 많지 않다. 물론 매년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 주택난이 항상 화두에 오르고 있지만, 정작 번화가를 벗어난 곳에서는 그리 사람을 생각보다 마주칠 일이 많이 없다.

한적한 곳에서의 산책을 즐기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도시가 아닐까 싶다.


주로 늘 걷던 길들로 걷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생각 혹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다 보면 늘 가던 동네인데도 모르는 가게, 모르는 길, 처음 보는 곳들이 자꾸 생겨난다.

자전거나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절대 몰랐을 것들,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들...

그것이 산책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이런 소소한 산책과 발견에서 일상의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도, 왠지 모를 기분 좋음-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다.



산책은 육체적뿐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를 가져다준다.


오래 걷다 보면 다리가 아플 때도 있고, 발가락이나 발바닥이 아플 때도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산책을 하다 보면, 육체적으로 아, 오늘은 운동을 좀 했구나-의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산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정신적인 부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산책을 하면, 맑은 공기가 코가 아닌 머리로 들어와 환기를 하는 느낌을 받는다.

머리를 비우는 느낌이랄까-

산책을 오래 하면 할수록 육체적으로는 점점 몸이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정신적으로는 머릿속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낀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거나 잡념이 많아질 때, 산책을 하며 주변을 바라보면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한없이 하찮고, 작게 느껴질 때가 많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을 보며 바쁘지만 활기찬 그들의 일상으로부터 힘을 얻기도 한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닌, 나에게는 일종의 Ritual이 아닐까 싶다.

이로 인해 일상의 루틴이 더 잘 잡히고, 나의 일상이 건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비가 오거나, 해가 나거나- 너무 더워 열대야로 고생스러운 한국의 날씨와는 다르게-

베를린은 7월 한 달, 연일 비가 계속 오는 매우 흐린 회색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혹은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밖에 나가 걷기 쉽지 않아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폭우가 아닌 이상, 비가 어느 정도 오는 날의 걷기를 더욱 즐긴다.

너무 덥지도 않고, 비가 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공기도 더 맑고, 거리의 사람도 많지 않다.


오늘도 산책을 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걷기 대신 글쓰기로 오늘의 정신적 환기를 대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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