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하이볼을 마셨을까.
레몬이 든 상큼한 하이볼을 마시고 나면 다음 날 속이 불편한 걸 알면서.
수성못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속이 편치 않다.
5분 전 도착한 은지는 넓은 국밥집에서 어느 자리가 편할 까 고민한 뒤 소파자리에 앉았다.
1시가 넘어서 봄날이 도착했다. 저녁에 한 번 봤던 터라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휴일 낮에 보니 같은 사람인지 헷갈렸다. 기억보다 훨씬 미남이군. 남자 배우 중에 닮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였더라.
그렇지만 처음 만나는 자리에 늦다니. 몸이 편치 않고 약속도 내가 나서서 정했더니 늦게 들어오는 봄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어제 직장 동료들과 골프 치고 노래방 갔다가 5시에 잤다고 한다. 그래. 오늘 약속은 너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사정이 있어서 늦게까지 회식할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오는 자신을 들여다보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은지야, 너 지금 뭐 하니?
봄날은 소고기곰탕을 시켜서 깍두기를 리필해 가며 국물까지 싹 비웠다. 비빔밥은 마치 회덮밥처럼 양배추채와 같은 생야채들을 봉긋하게 담아놓아서 손이 가질 않았다. 나는 채소를 한쪽에 덜어놓고 거의 밥만 먹었다. 된장찌개를 같이 먹으려 했는데 너무 매웠다.
비빔밥을 왜 그렇게 먹어? 야채 넣고 비벼서 된장이랑 같이 먹어야지.
배탈이 나서 잘 못 먹겠어. 된장찌개 좋아하는데 맵다.
차 마시러 갈까?
그러자. 스벅 리저브 매장이 경치가 좋던데.
콩 커피 어때? 여기 베트남 커피야.
거긴 처음 가 보는 곳인데. 좋아.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한의원에서 받아온 약을 따뜻한 차에 타서 마셨다. 초면에 물을 흘려가며 가루약을 타 먹는 모습이 평범치는 않지만 더 아파서 얘기도 못할까 꿋꿋하게 먹었다.
약이 아직 남았는데. 다 먹어야 낫지.
괜찮아. 충분히 먹었다.
누나 아침은 먹고 다녀?
그럼. 난 한식 좋아해서 아침에 밥이랑 된장찌개 먹어.
요리 잘하나 보네
그렇지. 내가 하는 게 젤 맛있어. 된장찌개, 김치찌개, 미역국, 순두부 등등 내 입맛대로 신선한 재료로 하면 완전 꿀맛이지.
김치도 할 수 있어?
야. 김치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잖아. 파는 김치도 맛있어.
10kg 사도 얼마 안 되는데 몇 만 원씩 하잖아. 직접 만들어야 맛있지.
끙. 뭐지. 시간여행을 떠나 조선시대 남자와 만나는 듯한 이 느낌.
수질 연구원이라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군. 형편이 어려운가?
저녁엔 주로 뭐 해?
나 주식 좀 하거든. 몇 년 하다 보니 차트 보는 눈이 생겨서 선물거래도 하고 있어.
나도 경제뉴스 자주 듣는데 선물은 꽤 위험하지 않니?
그런 만큼 수익률도 높아. 대신 손해도 크고. 10억 마이너스 됐을 때도 있어.
10억이나? 속 쓰렸겠네. 주식하느라 저녁에 연락도 안 하고 바쁘구나.
노트북 있으면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어. 노후대비도 되고. 연구실 직원이 한 명 휴직 들어가서 낮에는 좀 바빠. 그러다 보니 저녁에는 그냥 쉬고 싶어.
식사를 못한 탓에 3시가 되어가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낯선 남자와 예의를 갖춰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화젯거리를 찾아내며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빵 먹을래?
나 곰탕 한 그릇 다 먹었잖아. 그리고 밀가루 안 좋아해. 누나 먹어.
따뜻하게 데운 크로아상을 입에 넣으니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니 속도 좀 진정이 되는 듯했다. 같이 사 온 당절임 망고도 먹었다.
봄날은 망고 크기가 커서 먹기 싫다고 했다.
망고 얼마야?
이거 4000원? 얼마 안 해.
비싸네. 이렇게 작은데.
그거 전남친이 단골로 하던 멘트다.
그 말을 괜히 했었나. 그 이후로 우리는 전여친, 전남친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봄날의 전여친과 내가 하는 일이 비슷했고 전남친과 봄날의 성격과 가치관이 유사했다. 봄날도 나를 보며 전여친을 떠올렸을까?
심지어 남친 만나는 팁을 알려준다며 자신의 황당한 은둔형 여자친구상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놀랍게도 비슷한 사람이라 좀 더 눈길이 갔던 것 같다. 몇 년 전에 친구가 말한 것처럼 내 전 남자 친구는 나쁜 남자였다. 하지만 난 새로운 것에 매력을 느끼며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가치를 두는 성격이라 그런 남자에게 끌렸었다. 그리고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렸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것인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봄날은 나쁜 남자였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