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밑으로 다 들어. 이번에도 파도타기로 가는 거야. 파도 끊어지지 않게 해!
또 마시라고? 대체 몇 번째야.
은정은 연거푸 맥주를 권하는 남자 선배가 미웠다. 맛도 없는 술을 억지로 마셔야 대학생이 되는 건가. 이러려고 졸린 눈 비벼가며 야자 견뎌낸 건 아닌데.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여자 선배들도 은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남녀차별이 존재하는 걸까. 남자가 시키는 대로 여자가 움직여야 한다는 고정관념.
아. 어지럽다. 은정은 잔뜩 늘어놓은 운동화 더미에서 겨우 신발을 찾아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시큼한 맥주 냄새와 방안 가득한 과자 냄새를 벗어나니 싸늘한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드라마에서 보던 설레고 신선한 신입생환영회와 많이 다르다. 수능을 더 잘 봤더라면. SKY에 갔더라면 더 멋진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재수는 하기 싫다. 그 지긋지긋한 시험에서 느꼈던 압박감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
쉬었다 가야지. 아무도 없으니 계단에 잠시 앉자.
" 괜찮아?"
누군가 돌아보니 우리 과 청일점 5명 중에 하나다. 키 크고 눈도 크고 얼굴에는 아직 사춘기의 흔적이 남아있는 순둥순둥한 사슴느낌의 아이. 커다란 눈에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어쩌지. 뭐라고 답할까.
"응. "
아. 둘이 있으니 할 말도 없고 술 냄새도 날 것 같아서 계속 말하기도 망설여진다. 이제 대학 왔으니 연애도 해 봐야지. 이 사슴은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까. 정신을 차리고 먼저 질문을 던져본다.
"너 전에 술 마셔봤어?"
"아니. 술은 건강에 안 좋아."
오. 범생이구나. 내 스타일이네. 신입생 OT에 왔으니 꿈의 기회를 만들어 보자. 그럼 자신감이 생길 것이고 전혀 몰랐던 내 연애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