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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Jan 13. 2022

노.잼.회.피

사람은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기네스북에 등재된 ‘물속 숨 참기’의 최고 기록은 무려 24분 33초라고 한다. 잠을 안 자고 버티는 기록은 264시간 1분으로 날짜로 환산하면 11일 하고도 1분이란다. 그 외에도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 보유자들은 20시간 10분 동안 가만히 서 있던 사람(눈 깜빡임만 허용했다고…), 405시간 40분 동안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 127시간 동안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 등등이 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반인들을 넘어선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평범한 중년 여성, 빼빼 마른 아저씨, 심지어 피아노 연주 기록 보유자는 크리켓 선수라고 하니 저들의 놀라운 인내가 특별히 익숙하거나 유리한 조건하에서 만들어진 능력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정신력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넘어설 힘을 주기도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정신력의 힘이 모든 방면에서 발휘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영화는 한 자리에서 오래 볼 수 있는 사람이 책은 한 페이지도 넘기기 힘들기도 하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사람이 물속에서는 10초도 버티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참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게 재미가 있거나 최소한 노잼(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잘 참는 것은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들이었던 것 같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는데, 내가 아는 한 모든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물론 즐거운 과정이라는 것도 있지만 기대나 희망이 고통을 희석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내고 버텨내는 것을 잘 해왔던 것 같다. 결과를 보기 위해서, 아니 결과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고 존재 이유라고 여겨왔으니까


하지만 나의 정신은 스트레스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스트레스를 회피한다는 개념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단 하나의 취미도 없고 함몰되어 있는 당면과제에서 눈을 돌리거나 생각을 신선하게 할 줄도 몰랐다. 당연하게도 이런 삶은 타르처럼 눅진하게 가라앉아 끈적해진 몸과 마음만 남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

물론 필요하다. 여전히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고통이 없는 결과는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으면, 스스로 피하지 못한다고 포기해 버리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고 만다. 가라앉은 존재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내가 이 정도의 책임감으로 희생하기 때문에 가라앉은 거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이미 가라앉은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를 가라앉힌 존재에 대해서, 하찮은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은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는다.


나는 겸손한 성품이라 나서지 않고 있는 것뿐이라고? 겸손함은 정말 중요하지만 겸손의 본질을 착각하지는 말자. 스스로를 높여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겸손이지, 스스로를 낮추고 알아서 기는 것이 겸손이 아니다. 나 스스로를 존중해야 다른 사람도 존중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아침 출근길에 생각을 한번 해봤었다. 오늘 할 일 중에 재미없을 일이 뭐 있지?

- 뻔한 소리만 나오는 스탠드업 미팅
- 매일같이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A와의 상담
- 정치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표님과의 점심 후 티타임
- 지난주에 빠진 DAU에 대한 분석(사실은 책임소재를 묻기 위한) 미팅
'이 중 내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이유는? 나를 깎아내는 일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회피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지하철은 목적지에 닿아 있었다. 서울의 끝자락부터 강남까지 도달하는 길고 긴 시간이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출근길.




결국 나는 오늘 하나도 회피하지 못했다. 모두 참석했고 예상했던 만큼의 대미지를 받았다. (그 이상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회피하려는 궁리를 하던 순간만큼은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회피까지 할 수 있다면 해방감마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회피할 것을 고르는 일과 회피할 궁리를 찾는 과정은 분명하게 오늘 나의 하루를 어제보다는 새롭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느낌을 자각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언젠가는 나도 부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날개> 이상 中


재미만을 쫓으라고 부추기는 세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잼까지는 어려우면 노잼만이라도 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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