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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뭇별중한별 Jan 20. 2022

인생을 만드는 뜨개질

내 어린 시절 엄마는 시장에서 뜨개방을 운영했었다. 뜨개방이란 게 뭐냐면 점포 안에 뜨끈한 구들장 넓게 깔아놓고 뜨개질할 사람들을 모으고서 그 사람들에게 뜨개질 기술도 가르치고, 털실이나 뜨개질 도구 같은 걸 파는 것이다. 뜨개질할 사람이던 수다만 떨려는 사람이던, 어쨌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조건 좋은 게 뜨개방이었다.


뜨개방을 하기 전에 엄마는 미용실을 했었는데, 벌통에 벌이 모이듯이 친화력이 좋은 엄마의 미용실엔 늘 사람이 많았으나 결국 망하고 말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도 결국 돈이 벌리려면 머리를 해야 하는데, 고용한 미용사가 사람이 좋으면 기술이 별로고, 기술이 좋으면 선금만 받고 도망 다니기를 반복하니 사람들이 미용실에 와서는 수다만 실컷 떨고, 요구르트만 몇 통씩 마시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다. 엄마는 결국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작한 게 뜨개방이었다. 기술자 모시는건 못해도 수다 떨고 고스톱 치고 뜨개질하는 즐거운 놀자판 사랑방 만드는 건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 뜨개방에서 맡은 임무는 새댁들이 데리고 오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이터에서 놀아주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입담 좋기로 유명한 아줌마들이 뜨개방에 떴다는 소문이 나면 그 입에서 나오는 얘기를 들으려고 구들장에 다 앉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럴 때면 내가 놀아줘야 하는 애들도 불어나서 많을 때는 내 뒤를 쫓아다니는 아기 병정들이 족히 스물 남짓이 되는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특히 엄마가 없고 나만 가게를 보는 날이면) 말 없기로 유명한 아줌마들만 앉아서 절간처럼 조용하게 뜨개질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구들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책을 보다가 졸다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무척 조용한 날이었는데 때를 잘 못 맞춰 온 수다쟁이 아줌마가 말 상대가 없자 나를 불러일으켰다. 가져온 책도 다 보고 몹시 무료하던 터라서 아줌마 말 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는데, 음담패설 전문가인 아줌마가 초등 남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랴. 딱히 대화거리도 없어서 뜨개질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아줌마는 내 뜨개질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가 해보라고 했을 때는 질색팔색을 했었는데 막상 무료함을 달래려 바늘을 잡아보니 제법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왼손, 오른손을 교차하면서 한코 한코 떠가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고, 겉 뜨기와 안뜨기를 정확한 순서대로 교차하면서 짜다보면 집중도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재미를 느끼는 날들도 일주일 남짓, 짜던 목도리는 목을 겨우  바퀴 감을까 말까 지만 다리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니 계속하고 싶지가 않았다.   쉬었다 할라치면 다음날이 되고, 어제 하던걸 다시 잡으려니 선뜻 손이 가질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완성 목도리가 뜨개방 구석을 굴러다니자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더 안 뜰 거면 저 차단장 열어서 넣어놔. 실 아까우니 나중에 풀 거야.”


엄마가 말한 차 단장에는 이미 주인을 알 수 없는, 뜨다가 만 편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나처럼 삐뚤빼뚤 미숙한 것들도 있었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공이 많이 들어간 아름다운 것들도 있었다.

“엄마, 이런 것도 풀러? 좀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엄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주인이 완성을 못 시키면 그건 아무리 예뻐도 미완성이야. 미완성은 버려지거나 풀리는 신세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너는 뭐든지 하던걸 마무리 짓는 습관을 들이면서 살아. 알았지?”



“인생의 씨실과 날실” (비티 스텔리 지음)의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야 우리는 영혼의 씨실과 날실이 그동안 어떤 인생의 문양을 엮어왔는지 볼 수 있다.’


과연 그 말처럼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인생의 문양을 그리며 살아간다. 어떤 이의 문양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지만, 어떤 이의 문양은 초라하기 그지없기도 한데, 우리는 그 문양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문양이 어떤 것이던 시작은 실과 실이 교차하면서부터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인생을 만드는 실은 기쁨과 슬픔 모두라는 것도 말이다.


기쁨만 가득하고 슬픈 일은 없는 인생이 되기를 모든 사람들이 소망한다.

하지만 씨실이나 날실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옷감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기쁨과 슬픔은 인생이란 옷감을 만드는데 모두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때로 어떤 아름다운 문양은 씨실(기쁨)보다 날실(슬픔)이 더 많을 때 만들어지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인생이던 포기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이다. 아무리 문양이 아름다워도 완성되지 못한 옷감은 버려지거나 도로 풀리고 마는 것이니까.


나도 몇 해 전 40대를 시작하며 내가 짜 온 인생이란 옷감을 돌아보는 계기가 있었고, 그것이 너무나도 아름답지 못한 문양이라서 큰 좌절을 맛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상처받거나 주저앉지 않으려 한다. 잘 낫던 못 낫던 어쨌든 마지막 한 매듭, 그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평가는 완성품만이 받을 수 있는 법이니까.

또 아나? 내가 평가받을 시절에는 미의 기준이 바뀔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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