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NDWANA Aug 11. 2019

인간의 욕망과 사랑과 체념

[피아노 치는 여자] 옐리네크



옐리네크의 이 소설은 극단적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에리카의 불행한 상황, 어머니의 에리카에 대한 집착, 클레머의 남성중심적 바람끼를 접하며 자신의 상황이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옐리네크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성공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현실에서 일어나 수 있는 개연성을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고 싶은 욕구, 성공에 대한 욕구와 실패한 자신을 합리화하는 욕구, 상대에 대한 정복의 욕구와 상대를 조종하려는 욕구를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런 부분을 줄타기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말대로 욕구가 충족되거나 분출되지 못하면 욕망하는 기계들은 정실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모든 말초신경은 욕구의 해소로 난 작은 점을 응시하게 되고 그 점을 향해서 앞뒤 가릴것 없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에리카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다 히스테리에 걸리는 어머니, 면도칼을 꺼내서 자신의 살을 자르고 피를 흘리는 에리카, 에리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클레머의 행동은 자신의 욕구의 좌절로 인한 것이다.  


 

현실에서 무수하게 욕구에 좌절되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영해서 자신의 꿈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아이들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꿈인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며 살고 있지 않은가?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나에게 당연히 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김칫국을 마시다가 좌절하고 사랑은 끝났다며 울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상대를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는 대상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열등감을 타인에 대한 가학적인 행동으로 보상받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머셋 몸이 인간의 굴레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이성에 의해 좌우되는 동물이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감정에 좌우되며 그 끝이 파멸로 치닫을 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타인을 움직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할 확률이 적으며 성공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칼로 찌른 에리카가 마지막으로 돌아간 곳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어머니는 남자를 알아버린 에리카는 더 이상 자신의 둥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귀가시간이 늦어지더라도 안절부절 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껍질을 깬 아프락사스가 된 에리카는 비로소 자신의 욕망에 대해 다시 돌이켜 볼 것이고 다음 번의 사랑은 좀 더 평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다들 비슷비슷하듯이 사랑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욕망하고 사랑하고 체념하면서 그렇게 인간들은 살아간다. 

작가의 이전글 제1차 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