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버지스
시계태엽오렌지는 원작소설보다 큐브릭의 영화로 훨씬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큐브릭의 영화마저 20년이 넘게 상영금지영화로 묶여 있었던 바람에 어쩌면 더 유명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금지된 것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 법이니 말이다. 나도 시계태엽오렌지가 금지영화로 묶여 있던 시절에 이 영화를 은밀한 경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큐브릭은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해냈다. 장면도 거의 일치하고 원작이 전달하려했던 의도도 전혀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영상에 담아내었다. 큐브릭도 버지스가 이야기하려한 이 소설의 주제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였던 것이다.
그 주제는 폭력에 대한 것이다. 시계태엽오렌지에서는 세가지 폭력을 보여준다. 완전 구제불능의 쓰레기 범죄자인 알렉스라는 고등학생과 그 일당이 벌이는 약자들에 대한 폭력이 첫번째 폭력이다. 이것은 개인이 자유의지로 다른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리고 알렉스가 교화과정을 거치면서 보게되는 영상속의 폭력이 두번째다. 그것은 인류가 그동안 저질러왔던 학살과 만행, 홀로코스트이다. 이것은 국가나 권력, 민족 단위가 다른 국가나 민족에게 저질러졌던 폭력이다. 자신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담했던 알렉스마저도 이러한 단체로 이루어지는 폭력에는 매우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가나 권력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이것은 흔히 교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국가나 권력이 집행하는 폭력을 벗어날 수는 없다.
논란이 되는 것은 세번째 폭력일것이다. 원작에서도 범죄자들에 대해 인권을 무시하고 강력한 교화를 하는 정권과 죄수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대하는 정권이 서로 바뀌면서 독자들의 판단을 요구한다. 독자들은 알렉스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기제마저도 포기하게 만드는 교화에 대해 '저건 좀 심하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 바뀐 정권에 의해 알렉스가 예전의 악동으로 돌아오게 되자 '저 나쁜 놈이 다시 돌아온다고?'라고 경악한다. 폭력을 싫어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유지하자거나 대부분의 범죄에 대해서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이 사회가 파시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전체의 효율과 질서를 위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교화를 선택할 만큼 개인의 사정을 봐 줄 여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다른 적대적인 사회를 대하는 방식은 홀로코스트적인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2차대전의 끔찍했던 나치를 비난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씨앗은 사람들 개개인의 내부에 있는 작은 파시즘이 하나 둘씩 뭉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은 미미한 움직임이지만 마치 쇠를 먹는 불가사리나 한강의 괴물처럼 어느 순간 제어하기 힘든 성체로 자라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