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1'의 가치
우리의 삶이 디지털 세상처럼 '0'과 '1'로 이뤄졌다면...
어제저녁이었다.
회사에서 퇴근할 무렵, 나는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 풍경은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한낮에 푸르던 하늘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스스로 저물어가며, 마치 하루를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듯했다. 가까운 전신주 끝에 매달린 나뭇잎 하나가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분주한 흐름 속에서 잠시 한 호흡 쉬어가도 괜찮다며,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는 손길 같았다.
눈길을 돌리니, 내 책상 위엔 언제나 그렇듯 처리해야 할 서류 뭉치와 작은 메모지, 그리고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커피 잔이 남아 있다. 이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한 직장인의 일상이다. 특별한 일을 기대하기 어렵고, 때때로 단조롭게 느껴지는 반복들. 하지만 문득, 이런 평범한 일상이 지금의 나에겐 결코 당연하지도, 의미가 없지도 않다는 감사함이 스며들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앉아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일을 통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 그 평범함이 어쩌면 가장 단단한 발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런 평범한 일상이 감사하다는 마음이 일었다.
2017년 1월의 겨울. 그 해 초입에 나는 호기롭게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다. 새 출발을 꿈꾸며, 더 크고 멋진 기회를 찾을 수 있으리라 자신하며 터덜터덜 걸어 나왔지만, 그 선택은 몹시 경솔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던 때가 있다. 새로운 일자리를 정해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선택말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차가운 거리 한복판에서, 아무런 목표 지점도 없이 떠돌며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새벽녘까지 조그만 방 안에서, 희뿌연 커튼 틈새로 새어드는 불빛 속에 앉아 포털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날들. 날이 밝으면 아무 계획 없이 길을 나서, 벤치에 앉아 낯선 이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오후들. 눈을 뜨면 오늘 갈 곳, 손댈 일이 없어 허둥대던 아침들. 아내와 아이를 마주할 수 없을 만큼 죄책감에 시달렸던 날들, 마치 텅 빈 무대 위에서 혼자 발자국 소리만 울리는 조용한 극장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진짜 ‘0’의 상태가 얼마나 위태롭고 쓸쓸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머릿속에서만 반짝이던 멋진 미래는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일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뿌리내릴 땅도, 온기 품을 씨앗 한 톨도 없이 허공에 매달린 기분. 발을 내디딜 곳 하나 없는 낭떠러지 끝에 선 사람처럼, 발끝이 붕 떠 있는 불안감만을 안고 있었다. 한 번에 커다란 사과를 얻고자 뛰어들었지만, 씨앗은커녕 씨앗을 뿌릴 흙조차 없는 메마른 벌판 위에서 갈증만 삼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처절한 날들을 견디면서, 내가 한때 당연하게 여겼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내게 많은 의미를 주고, 많은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줬는지를 깨닫게 됐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출근하고, 누군가 차려준 사무공간에서 작은 일부터 성실히 해나가며, 어제의 연장선 위에서 오늘을 맞이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이 흔한 일상 덕택에 나는 하루를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의 삶과 인생, 그리고 그것을 채워나가는 일상 속 시간들이 디지털 세상처럼 0과 1로 이뤄졌다면, 단순한 ‘1’이라는 단위 — 가령 하루치의 업무, 하나의 역할, 하나의 책임 — 는 분명 공허한 ‘0’의 상태와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하나라는 존재는 비록 그 자체로 완벽한 결실이나 찬란한 성취는 아닐지라도, 분명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숫자임에 분명하다.
그때 이후 나는 달라졌다.
지금의 나는 작은 서류 한 장, 메모지에 적힌 간단한 할 일 하나조차도 앞으로 나아갈 자양분처럼 느낀다. 비록 미미한 것이지만, 그 하나가 모이고 이어질 때 아주 천천히라도 높은 지대로 오를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이 1이라는 단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려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그 1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길을 이루고, 길이 모여 나의 생을 그림으로 그려나간다. 한 알의 씨앗이 언젠가 꽃이 되고 열매를 맺듯이, 지금 손에 쥔 작은 일 하나가 미래를 향한 단서를 마련해주고 있음을 난 믿는다.
창밖을 다시 바라보니 석양의 노을은 잔잔하다. 화려한 무대 장치 없이, 스펙터클한 장관 없이도 그저 저물며 밤으로 건너가는 하루다. 나는 안다. 이 평범한 석양 속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내일을 품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오늘이라 해도, 그 속에 움트는 미세한 변화와 가능성이 분명 내 삶 어디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안다. 1이라는 작은 숫자 앞에서 조용히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0이 아님을 감사해서다.
나는 믿는다.
오늘의 감사함이 내일 아침 또 다른 감사로 이어지고, 모레에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번져나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