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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Dec 22. 2024

욕망의 끝은 파멸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 '상류사회', '은교', '더 킹' 후기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 어느덧 40대 중반을 넘어 50대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멈춰 서 있고자 하지만, 시간은 나를 비웃듯 내달리고 있다.


10대엔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가는 것이 불만이었다. 하루가 너무도 가지 않아 빨리 20살이 되었으면 했을 때가 있었다.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린이 되면 내 지금의 모든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날의 치기였다.


20대엔 내게 시간이 많다고 착각했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난 20대는 1평 남짓한 독서실에서 내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난 내 삶의 시간이란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30대에 접어들며 나는 마치 시간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10대와 20대의 어둡고 막막했던 삶에 드디어 햇빛이 비추는 듯했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언제나 태양의 중심 같았고, 그 빛 속에서 나는 '자신감'이란 이름의 가면을 썼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서서히 오만과 경솔함으로 변절되어 갔고, 나는 그 변질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내 삶의 욕망이 채워지는 시기였다.


40대가 되고서야 나는 처음으로 어둠을 맞이했다. 그 더움은 내 삶에 들어온 권력의 그림자였다. 언론사를 떠나 기업의 세계로 발을 들이며 권력이란 무엇인지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무기였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기도 했다. 나는 그 괴물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고, 그 무력감 속에서 깨달았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기댄 것들은 내가 쌓은 것이 아니라, 그저 권력을 가진 이들 옆에서 기생하며 얻어낸 부스러기였음을 깨닫게 됐다. 내 앞에 작은 괴물도 쳐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야 했다.


그때 깨달았다.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남을 위해 쓰일 수도 없단 걸. 그것은 오직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누리는 동안 점점 더 독해져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권력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면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권력이 가진 속성이다. 그렇게 제정신인 사람들도 권력을 맛보면 괴물이 되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는 그 더러움에 맞서보겠다고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괴물은 더욱더 쾌감을 느끼는 듯 보였고, 나는 발버둥 칠수록 더욱더 깊게 병들어갔다. 내가 내뱉은 말이 독이 되어 나를 점점 더 병들게 했다. 그리고 내 몸은 권력의 탈을 쓴 괴물을 이겨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달려드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제자리에서 깊은 늪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 늪은 더욱 나를 짓눌렀고 죽음의 문턱까지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무도 바보 같았음을. 30대에 권력 옆에서 기생하면서 나 자신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호가호위'하면서 그 권력이 진짜 내 거라고 착각하고 살았음을 인정했다. 깊은 늪에서 결국 세상의 잔혹함을 받아들였다. 내 무력함을, 내 과거의 착각을, 내가 가진 것의 허상을. 깊은 늪은 그 모든 것을 내게서 벗겨냈다. 늪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서야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늪은 나를 삼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욕망을 나로부터 벗겨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10대의 느리던 시간도, 20대의 무한히 주어진 줄 알았던 시간도, 30대의 눈부시게 나를 비추던 태양도, 40대의 어둠도 모두 한 가지로 통하는 조각이었다는 것을. 시간을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지만, 시간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변화시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독한 감기에 걸려
이번 주말은 온종일 누워서 보냈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고 일어나면 영화 보고를 반복했다. 오랜만에 일을 하지 않고 오롯이 쉬며 보냈다.


주말 동안 영화 4편을 봤다. '상류사회', '은교', '더킹', '타짜'다. 이들 영화는 각기 다른 인물들의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을 그려내고 있다.


'상류사회'는 경제학 교수이자 국회의원에 출마한 박태준(박해일)과 그의 아내 오수연(수애)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며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꿈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패와 비리, 그리고 도덕적 타락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이 나누는 대사 속에서 이들의 욕망이 얼마나 집요한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욕망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끈다.


'은교'는 70대 시인 이적요(박해일)와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17세 소녀 은교(김고은)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그린다. 이적요는 은교를 통해 젊음과 예술적 영감을 되찾으려 하고, 서지우는 스승에 대한 질투와 은교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대사를 통해 욕망은 늙지 않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들의 얽힌 감정은 결국 달콤했던 순간들을 끝으로 파국을 맞이한다.


'더 킹'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박태수(조인성)가 권력의 맛을 보고 검사가 되어 부와 권력을 좇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정치 검사 한강식(정우성)의 파벌에 들어가 승승장구하지만, 결국 부패한 권력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흘러가듯 가.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자존심 버려 잡으라구. 그것 놓치고 나서 여기서 잘된 사람 없어"라는 대사는 권력의 잔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태수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파멸을 깨닫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리고 '타짜: 원 아이드 잭'. 이 영화는 도박판이라는 극단적인 무대를 통해 인간의 욕망,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날카롭게 묘사한다. 주인공 도일출(박정민)은 평범한 청년으로 시작하지만, 우연히 얽힌 한 여성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기 시작한다. 그녀의 부름, “국밥 먹으러 가자”는 그저 사소한 제안처럼 들렸지만, 도일출은 바로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만약 그날 그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혹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장면은 단순한 사건 이상의 것을 함축한다. 인간의 삶에는 이처럼 작고도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넘기는 순간들이 사실은 운명을 바꾸는 문턱이 될 수 있다는 진리. 도일출은 그 작은 선택의 결과로 도박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고, 끝내는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파국을 경험한다.


영화가 끝나고 멍해졌다. 그리고 오늘 만난 영화들이 모두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형성하는가, 아니면 삶이 인간을 선택하는가?"



나는 어둠 속을 겨우겨우 빠져나와 다시 일상 속에서 부단히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경쟁 속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처절하게 부서져라 용쓰고 있다. 이번에 얻은 감기도 한 주간 얼마나 긴장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내 삶의 '훈장'(?)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긴장 속에서 살았다는 것이니...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고,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그게 인생이다. 분명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 뒤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아보니, 인생은 대개 커다란 결단에서가 아니라,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소한 선택에서 방향이 정해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우리가 길가에서 만난 누군가와의 짧은 대화, 우연히 들어간 가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제안이 결국 우리 삶의 궤적을 바꿔놓는다. 마치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 도입부 속 “국밥 먹으러 가자”는 한마디가 도일출의 삶을 나락으로 던져 넣은 것처럼. 우리 삶에도 그렇게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이 존재한다.


단순한 영화적 설정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이러한 순간의 연속이다.


영화 '상류사회'에서도 이러한 삶의 선택과 유혹이 나타난다. 주인공 태준(박해일)은 권력과 명예를 좇아 올라가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자신의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들의 대사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욕망의 덫에 걸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혹은 처음엔 작은 갈등으로 다가오지만, 선택할수록 삶의 본질을 왜곡한다.


'은교'는 젊음과 욕망, 그리고 시간의 무게란 메시지를 내게 강요했다. 주인공 이적요(박해일)는 자신의 늙음 앞에서 젊음이라는 유혹에 흔들린다. 이적요가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절감하며 던지는 고백이다. 그에게 젊음은 잃어버린 과거이자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갈망이다. 하지만 그 갈망을 좇아 선택한 길이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은, 우리의 삶 역시 욕망에 의해 결정될 때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 킹'에서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선택의 순간들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다룬다. 그의 선택은 권력을 쥐려는 자가 감당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면서도, 때로는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내 삶에 더 큰 무게로 나를 짓누르기도 한다. 도일출은 한순간의 선택으로 자신의 인생이 파멸로 치닫는 걸 경험했지만, 사실 그 선택을 했던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은 더 뼈아프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내가 그 순간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았던가?'


이 영화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유혹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를 보여준다. 이들의 메시지는 동일하다.


"작은 선택이란 없다. 매 순간의 선택이 자신을 만든다."


삶은 늘 함정과 유혹으로 가득 차 있다. '타짜: 원 아이드 잭'의 도일출처럼, 우리도 작은 선택 하나가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선택 뒤에 남는 것은 후회일 수도 있고, 혹독한 교훈일 수도 있다.


40대 이후의 삶은 그러한 질문과 마주하는 시기다. 처절하게 보냈던 20대, 욕망을 갈구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30대를 지나, 40대는 받은 보상의 무게와 그에 따른 함정, 그리고 고독 속에서 절제의 삶을 택해야 하는 시기다. 그 함정과 유혹은 우리의 인생을 끊임없이 흔들지만, 결국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고독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뿐이다.


영화들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수렴한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내 삶의 방향은 이 질문에 달려 있다.


선택은 항상 유혹과 함께 찾아오며, 그 유혹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에는 결국 대가가 따른다.



이들 영화는 모두 인간의 돈, 술, 이성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파멸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화면 속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 경계를 넘나들며,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첫 번째 돈

화면 가득히 넘실거리는 지폐 뭉치와 부유함을 상징하는 화려한 가구들. 주인공은 처음엔 단순한 꿈을 꾸었다. 더 나은 삶, 더 큰 집, 더 높은 지위를 향한 소망은 누구나 품을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돈은 언제나 욕망을 증폭시킨다. 그들의 눈빛은 갈수록 번들거렸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양심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이것만 얻으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야."


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돈은 주인이 아니라 주종 관계를 뒤바꿨다. 그들은 돈을 얻었지만, 돈에 사로잡혔다. 돈을 위해 쌓은 모든 것은 결국 그들을 덮치며 무너져 내렸다.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의 마지막 대사가 가슴을 내리찍었다.


"내가 영감 따라 도박판 기웃거리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 먹을 만큼 먹었으면 눈 딱 감고 일어나라"


'절제'다. 그래야 산다.


단순한 승패를 넘어 삶의 본질을 꿰뚫는다. 도박판에서의 돈과 승리는 그저 미끼일 뿐이며, 사람들은 그 판 안에 갇혀 허망한 욕망에 매달린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돈을 좇으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그 끝에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는가?"


결국 인생도 도박판에 불과하다. 돈이란, 쥐면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히지 않는다. 영화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돈을 좇는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박이며,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지켜가는지에 달려 있다고.


결국, 삶이란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과 욕망의 유혹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결정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쫓고 있는가?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두 번째 술

작은 잔 속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액체는 처음에는 단순한 기쁨이었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나누는 웃음, 취기에 붉어진 얼굴들, 유쾌한 농담들. 그리고 유쾌하게 오가는 농담들. 술은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순간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술은 진실을 흐리게 하고, 판단력을 마비시키며, 그 순간의 즐거움을 대가로 삶을 갉아먹는다.


영화 '더 킹'에서 박태수(조인성)가 권력을 얻고 술과 연회로 뒤덮인 나날을 보내는 장면이 떠오른다. 술은 그에게 권력의 달콤한 맛을 더욱 부추기는 도구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를 자만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


"한 잔 더 "


이 말은 흔히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 순간은 내 안에 숨겨진 욕망의 족쇄를 풀어버리는 순간기도 하다. 술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가장 파괴적으로 변질시키는 매개체다.


영화 '상류사회'에서는 태준(박해일 분)과 그의 아내가 술자리에서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며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술은 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것을 걷잡을 수 없이 파괴한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지만, 결국 진짜 취한 건 그 사람의 욕망이다."


술이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욕망과 허세, 그리고 진실을 뒤섞는 혼합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술에 취해 내뱉는 말과 행동은 순간의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곧 더 깊은 후회를 만들어낸다. 깨진 잔처럼 그들의 관계와 삶은 흐트러지고, 자신마저 잃어버린다.


술이란 작은 잔에 담긴 욕망이다.


한 잔, 두 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새 통제 불가능한 소용돌이가 되어 우리의 삶을 휘몰아친다.


"그 한 잔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인가?"


술은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술은 진실을 흐리게 했다. 술에 취한 채 내뱉은 말은 곧 독이 되었고, 흐려진 판단력은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세 번째 이성

이성은 달콤하지만 위험한 독이다. 아름다움과 젊음은 유혹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들은 순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순간의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다. 화면 속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에 매혹됐고, 여자는 권력을 손에 쥔 남자의 손길에 흔들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랑의 주인이라 믿었으나, 실은 이미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들이 믿었던 사랑은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놓인 덫이었다.


"세상사람들은 칠십 노인하고 여고생 관계, 그거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더러운 스캔들이라구요!"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박해일)가 젊은 은교(김고은)에게 느꼈던 욕망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집착, 젊음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는 젊음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상류사회'에서도 권력을 쥔 남성과 야망에 찬 여성의 관계가 그려진다. 서로의 욕망이 얽힌 그들의 관계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었다.


악마의 등장

돈과 술, 이성이란 삼박자가 다 먹혀들어 인간을 쾌락이란 굴레에 가두고 나면,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스스로의 의지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악마가 준비한 무대일 뿐이다."


악마는 처음에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먼 곳에서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주인공들의 모습이 비슷하게 그려진다. 권력을 잡고 술과 연애, 그리고 화려한 생활 속에 빠진다. 그리고 달콤한 쾌락 뒤에 찾아오는 긴 어둠의 시작, 모든 걸 잃는다.


그것이 바로 삼대 욕망을 건넨 악마가 준비한 무대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


악마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사람들의 삶을 조여 온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린 뒤, 그들을 조종한다.


이성은 우리가 가장 취약할 때, 가장 매혹적인 얼굴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 달콤한 유혹 뒤에 숨어 있는 악마는 우리의 삶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집어삼킨다.


삶은 언제나 선택이다. 그러나 이성 앞에서의 선택은 그만큼 더 치명적이다. 악마가 준비한 무대 위에 서게 되면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 무대에 오른 것인가?"



삶은 고통이다. 절제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며,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하는 무대다.


돈, 술, 이성이라는 이름의 유혹들은 마치 악마가 손수 설계한 장치처럼 우리가 나아가는 길목길목에 수없이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선택은 때로는 너무 작아서 무의미해 보이고, 때로는 너무 커서 벅차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유혹은 늘 달콤하고, 그것이 던지는 약속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돈은 더 나은 삶을, 술은 고단함 속의 위로를, 이성은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달콤함 뒤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한순간의 쾌락 뒤에 깊은 후회와 맞닥뜨리곤 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영화 속에서 던져지는 대사가 아니라, 우리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묵직한 물음이다.


'나는 무엇을 쫓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삶의 무대 위에서 나의 선택은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지는 않은가?'


40여 년의 삶을 돌아보니, 모든 유혹은 나를 시험하기 위한 무대였고, 모든 실패는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교훈이었다. 때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 유혹에 빠져든 대가로 혹독한 어둠을 맛봤다. 그리고 다시는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완벽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고, 거짓없이 부끄러워할 줄 알고 회개하고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려는 용기다.


악마가 미소 짓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하며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내 삶은 내 삶이 될 수 있다.


"삶은 늘 유혹으로 엮이고, 선택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내 삶의 이야기가 된다"


이번 주말 예상치 못한 마음속 울림을 얻어 기록으로 남긴다.


2024.12.22 오후 12:22
새로운 해를 맞을 준비를 하며
광화문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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