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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화문덕 Jan 01. 2016

#32. 억울함의 의미를 되새기다

값비싼 그 날을 기억하려 오늘도 애쓴다

이런 XXXXXXX

전화기 너머로 욕이 날아왔다. 저녁 9시쯤이었다. 갑작스러운 선배의 불호령이었다. 선배는 내게 피를 토하듯 화를 냈다. 그야말로 앞뒤 가리지 않는 듯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차분히 들어야 했다. 자초지종을 파악해야만 했다.


듣고 보니 최근 내가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이 시발점이었다.

사건의 내막

난 신입 기자들 교육을 맡고 있었다. 온라인 매체는 수습교육이 따로 없다. 그냥 선배들이 회의실에 모아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난 신입 교육 담당으로 차출됐다. 선배들과 부·국장, 대표는 나를 신뢰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난 후배들에게 거침없이 말하곤 했다.


"난 나보다 먼저 입사했다고 무조건 선배를 존경하지 않아"


회사 선배를 무시한다고 한 발언은 아니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던 "난 널 후배로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한 모 선배에 대한 반감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이제 갓 입사한 기자들에게 했다는 것에 대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한 코멘트였음을 인정한다. 지금은 이런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내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함부로 속마음을 펼쳐 보이지 않는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이다. 말조심 또 조심!!!


이 말이 돌고 돌아 모 선배에게 들어갔고, 그 선배는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녁 자리를 하던 중에 정신없이 선배의 욕을 들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거리에서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 역시 반감이 있었다. 술이 좀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던 것도 있지만,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내게 육두문자를 무자비하게 날려대는 그를 수준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이런 이야길 선배에게 했을까?

사실 선배한테 욕을 들으면서 떠오른 느낌은 '분하다'였다. '누가 이 이야길 선배에게 전했을까?'란 화가 솟구쳤다. 원망이었다. 사적인 대화를 옮겼다는 것에 대한 원망...


한 여자 후배가 떠올랐다. 그 후배는 평소 그 선배와 각별하게 지내는 듯 보였다.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가 모 선배한테 이런 소리 옮겼냐?"


난 내 직감만 믿고 후배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도 않은 체 몰아붙였다. 후배는 꽤 당황한 듯했다. 다만 후배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당시 나의 행동은 경솔했다. 늘 반성하고 있다.


잠시 후 모 선배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야 너 지금 색출작업하고 있냐? XX새끼가.

너 내가 선배들에게 네가 이런 소리 하고 다닌다고 공론화해 볼까? 이런 XXXXXXXXXXX"


아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을 날이다. 끊임없이 욕이 날라왔다. 나의 분함 수치는 계속 올라갔다. 이미 한계를 넘어 우주 위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들이받을 수는 없었다.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들이받으면 이 회사를 더는 다니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후...

몇 주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분하기도 했거니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 선배랑은 마주치기도 싫었다.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했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모 선배에게 전한 후배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너무 싫었다. 모든 후배가 진저리가 나도록 싫었다. 후배들 얼굴 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반성...

그 말을 옮긴 이가 누군지 알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작 말을 옮겼다고 추궁했던 이는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고 다니면서 선배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매우 순해 보였는데.... 그 아이는 자신의 말로 인해 회사 내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 미안하다. 그때 네가 모 선배에게 얘기했다고 믿고 있었어... 용서해주겠니...?"


난 내가 추궁했던 후배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 후배는 쿨하게 내 사과를 받아줬다......

깨달음...

그 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억울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는 것이다.


모 선배는 나를 추궁했고 난 한 후배를 원망했다. 후배는 고스란히 이 모든 것을 감내했다.


억울했을 텐데 모든 것을 본인이 짊어졌다. 그 어디에도 표출하지 않았다. 난 그런 점에서 그 후배를 존경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들 때마다 지금도 그 후배에게 미안하다.


그 이후 난 억울한 상황에 직면하면 그때를 되새긴다. 그리고 내가 감내할 수 있는 상황이면 감내하려고 노력한다. 나보다 약자에게 억울함을 전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억울한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을 알게됐다.


값비싼 교훈을 얻은 그 날을 난 기억하려고 애쓴다. 늘 반성한다. 내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난 그때를 떠올린다. 억울함이란 의미에 대해 마음속 깊이 새긴 그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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