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은 형편없었지만 함께 성장하고 싶은 회사를 찾았다
마이너 기자의 삶이란 이런 것뿐인가...
두 번의 인턴 실패. 무엇보다 마이너스 인센티브의 충격은 꽤 오래갔다. 미디어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싹텄다. 입사 원서를 섣불리 넣지 않았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공대생으로서 난 더 이상 매력이 없었다. 프로그램 코딩에 손 놓은 지도 2년이 넘었다. 갓 대학 졸업한 이들, 죽으라 코딩만 했던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중소기업에서 일해야 한다면 후회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매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모집 공고를 내는 곳이 어떤 곳인지, 기사가 수시로 업데이트되는지, 바이라인에 이름을 올리는 기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등을 체크했다. 회사의 대표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회사의 데스크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돼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꼼꼼히 알아봤다.
내 주위에 현직 기자 선배가 있었다면, 이런 수고로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기댈 언덕이 없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인터넷뿐이었다.
이와 중에 또 낙방했다. 1차 서류에서...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반겨줄 건실한 마이너를 찾는 것뿐이었다. 거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회사와 함께 성장해 독자들로부터 '대한민국 기자'로 인정받겠다고 다짐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느꼈다.
건실한 마이너를 구별한다는 것은 수험생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로 모집 공고가 가뭄인 상황에서 지원할 곳을 걸러낸다는 것이 사치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난 가려야만 했다. 인턴 때의 악몽 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난 다시 지쳐가고 있었다.
두둥
그러던 중... 처음 들어보는 매체에서 모집 공고가 떴다. 온라인 경제 전문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봤다. 성장하고 있는 매체였다. 다른 매체와 비교해 기사의 내용도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한 기사가 아닌 외신을 번역한 제대로 된 기사였다. 콘텐츠 판매를 통한 수익 다변화도 꾀하고 있었다.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깊어 보였다. 다른 매체들과 달라 보였다. 당시 수험생의 시각으로 봤을 땐 그랬다.
손해볼 거 없잖아
일단 원서를 넣어보기로 했다. 이전 편에서 언급했던 그 <이력서.TXT>파일을 말이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도착해보니 나 혼자였다. 면접 장소는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사무실 한쪽에 칸막이로 만든 임시 회의실 같은 곳에서 면접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필기시험과 면접이 이날 함께 진행됐다.
애초 모집 공고에 없던 필기시험에 당황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난 알고 있었다. 쉽게 입사한 것에 따른 대가의 혹독함을... 필기시험을 봤다는 것에 나의 불안함은 호감으로 바뀌었다. '여긴 그래도 사람을 가려 뽑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주제는 생각나지 않지만, 상당히 어려운 경제 이슈에 대해서 글을 써보라고 했던 것 같다. 마침 면접 보러 가기 전에 대충 봤던 이슈여서 백지 제출은 면했다.
그러고 나서 면접이 진행됐다. "자네 스트레이트가 뭔지 아나?"라는 질문에 난 문장의 구성에 대해서 답했다. "사실에 근거한 기사로 주어+날짜+주요 내용을 풀어주는 기사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지금 생각해도 스트레이트에 대한 정의를 이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했다는 것이 대견하다. 아주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겠지만... 아무튼 당시 선방했다고 본다.
이후부터는 개인 신상에 대한 질문들로 흘러갔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자네 영어는 잘하나?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지?
솔직히 이 질문은 어이없었다. 처음 들어본 매체였다. 성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별도로 매체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곳이었다. 면접에 임하면서도 '최종 합격하면 입사해야지'란 확신은 없었다. '일단 최종 합격하면 그때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면접에 임했다. 그래서였을까? 내 대답은 아주 쿨했다.
제가 영어를 못해서 이 회사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 누구와 경쟁해도 이겨낼 자신 있습니다.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싶어서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영어를 못해서 이 회사까지 왔습니다.' 이 멘트는 지금 생각해도 어찌 이런 얘길 했나 싶기도 하다. 물론 뒤의 멘트는 손발이 오그라들긴 하지만...
면접보고 나오면서 '이 회사에서도 떨어졌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못해서 너희 회사까지 오게 됐다"는 도발적인 답을 했는데 받아줄 리 없다고 판단했다.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청역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역 번호 '(02)'로 시작하는 유선 전화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세요!
합격 전화였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출근 D-day에 맞춰 시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렇게 인턴기자가 아닌 정규직 기자로서 다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음 주에 계속...
에필로그
사실 제가 첫 연봉계약서를 쓰면서 제시받았던 연봉은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 돈을 받고 왜 거길 들어갔느냐"고 했지만, 당시 전 이 회사에 대해서만큼은 비전이 있었습니다. 커가는 매체였고, 실제 출입처에서도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만의 생각일 수 있었습니다. 착각은 자유란 말도 있잖아요. ^^
이 회사는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양질의 기사로 수익을 내겠다는 신념이 있는 기자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하면 회사도 나도 함께 성장할 수 있겠구나'란 믿음을 준 회사였죠.
지금으로 따지면, 스타트업을 찾아 입사하는 이들의 마음과 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대표의 마인드가 좋았습니다. 권위를 내려놓고 직원 한 명 한 명과 소통하고자 하는 모습도 존경스러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조직문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조직에서 일해봤다는 것 자체가 제 삶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입사 후 기자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해보겠습니다.
누군가 제게 기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그때"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때의 열정과 풋풋했던 제 모습이 그리워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로서 열정은 아직도 뜨겁습니다. 하지만 당시처럼 순수했던 열정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열정 속에는 이물질이 섞여 있어 가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꾸 이물질을 던지는 이들 때문에 힘들어할 때도 잦고요. 흰색 머리카락이 제법 생겼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선후배들은 제게 "너도 이제 늙어가는구나"라고 말을 할 정도니까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마케팅부장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지원자가 160명 정도 됐는데 그중에 너 혼자 붙은 거니까 자신감을 가져"라고요. 당시 최종 합격자가 저 혼자였거든요. '지원자가 없어서 나 혼자 뽑혔나'란 불안함도 있었습니다. 이전 두 번의 인턴 실패로 입사 초기에는 조직 생활에 다소 소극적이기도 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해준 걸 보면 제가 좀 불쌍해 보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