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 사상
인도 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緣起)입니다.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만물은 원인(因, 인)과 조건(緣, 연)에서 일어나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연히 생기거나 홀로 생기지 않으며 타 와의 관계 속에서 생긴다'는 뜻이죠.
이를 통해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我)는 없다.'라는 무아(無我)를 말합니다. 만물은 인과 연에 의해 상호의존적으로 생긴 결과이기 때문이죠. '사물은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에 공(空)이다.'라 하여 '만물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자성(自性, 다른 것과도 관계되지 않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지 않는다.' 즉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것이 공 사상입니다.
* 굳이 인, 연, 무아, 나(我), 공의 모든 점을 이해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단어도 관계를 설명하는 것일 뿐 본 뜻은 없습니다. 그러니 느끼시고 흐름을 따라 맞기 셨으면 합니다.
There is no spoon
영화 '매트릭스'에서 공 사상과 관련된 장면이 있습니다. 네오가 오라클을 만나기 위해 기다릴 때 승려복을 입은 소년과의 대화 장면입니다. 소년은 숟가락을 자유자재로 휘게 하는 염력을 연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네오가 관심을 가지자 소년이 말을 건넵니다.
Do not try and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there is no spoon.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that bends, it is only yourself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대신, 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숟가락은 없어요. 그러면 알게 될 겁니다. 휘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요.
숟가락은 실체가 없기에 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인식이 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오는 이 대화로 들고 있던 숟가락을 휘게 하고 내면적으로 깨닫기 시작하지요.
매트릭스의 세계가 가상의 세계이기에 공 사상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다양한 종교 사상을 이용하여 영화가 전개되지만 승려복을 입은 소년이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은 불교 사상을 이야기하려는 감독의 의도 같아 보였습니다.
다발 이론(bundle theory)과 차이
앞 선 글에서 '특성들이 구성된 집합체가 대상이 된다'는 다발 이론을 보셨다면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 생긴다'는 공 사상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다발 이론은 특성들이 모인 단순한 모음체(collection)로 보았다면 공 사상에서는 원인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어나 생긴 흐름이라고 보았습니다. 연기설을 설명할 때 씨앗이라는 인(因)이 햇빛, 물, 흙이라는 연(緣)을 만나 꽃이 핀다라고 합니다. 반면 다발 이론은 꽃잎, 수술, 암술, 꽃받침, 향 등이 모여 꽃을 나타낸다고 설명하지요. '본연의 특성을 가지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는 점만 비슷할 뿐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
여기까지가 공 사상의 안내문과 현대 시각에 본 일부 내용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신 스스로 답 혹은 깨달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불교는 종교라 하기에 딱 떨어지는 규정이 없지요. 스스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생각들로 발전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그래서 현대 불교에서 만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러한 생각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용어로만 봐도 현재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무(無), 공(空)을 같은 개념으로 말하기도 하고 구분하는 곳도 있습니다. 또한 오랜 시간 지나오며 산스크리트어로 출발해 한문, 그리고 한글로 번역되었기에 그 과정 속에서 원뜻이 조금 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인도조차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기에 번역도 다양하지요. 그래서 원어로 간주되는 '슌야'(śūnya)가 공(空)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모든 단어가 완전히 대치되지 않기에 한계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여기서 인과 연을 원인과 조건이라는 단어보다도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무아, 자성도 무언가를 이야기할 요소일 뿐 그곳에만 붙잡혀 한계 혹은 한정하지 않는 것이 공 사상의 시작이라 생각됩니다.
0과 空
다만 출발점 혹은 계기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름인 '공', '비어있다'는 것에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단어 중 또 다른 공이 있습니다. 바로 전화번호를 말할 때 반드시 말하는 숫자 '0'입니다. 영 혹은 공이라고 부르지요. 0은 인도에서 발명되어 '슌야'(śūnya)라고 불렸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같은 원어이지요. 그래서 한자로도 空입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인연설에서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하였습니다.
0은 다른 숫자에 비해 최근에 만들어진 숫자입니다. '존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있는 것으로 표현할 수가 있냐'는 이유겠지요. 왠지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타 와의 관계 속에서만 생긴다. 자신만의 유일한 특성(자성)은 없다'라고 하는 인연설과 공 사상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지만 있는 것처럼 말하는 느낌 말입니다.
0은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요. 여기서 0의 형태를 살펴보면 원 안에 비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원안에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없다'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무엇이 없다고 하지요. '사과가 없다'. '방법이 없다', '고민이 없다'등 '무엇이' 생략해서 말하더라도 의미에는 포함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없다'라고 말하면 '뭐가'라고 자연스럽게 묻게 되지요. '없다'라는 단어도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언가' 뿐만 아니라 '있다'가 존재하기에 의미를 뚜렷하게 되지요. 모든 언어가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자성을 갖지 않지만 '0'과 '없다'는 그 뜻이 더욱 진하게 느겼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비어있다'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어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0처럼 틀 혹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공간 또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이루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죠.
사람도 만물 중 하나이기에 "공간이 '나'라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느끼는 실체는 없어 보이지만 그곳에 어떤 것들을 있으므로 관계 속에서 변해가는 '나'가 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허나 그릇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릇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그 그릇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즉, 차가 채워져 있으면 찻잔, 술이 채워져 있으면 술잔, 과일이 담겨 있으면 과일 접시,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이 되듯이 채워진 대상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며 이름이 달라지듯, 담긴 그릇 자체가 하나의 대상인 것이죠. 더 확장한다면 그릇에 담는 것뿐 아니라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서도 그릇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차례상, 다과상, 술상 심지어 집 안의 바닥, 벤치의 위까지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릇도 시간에 따라 변하지만 공간보다는 실제적이며 구체적입니다. 그래서 그릇 자체의 크기, 소재, 형태와 같은 특성도 존재하여, 도자기, 유기, 유리, 뚝배기, 종지 등으로 나뉠 수 있죠. 그릇 본연의 특성으로 이미 존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릇이라고 한계점을 만들기보다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간이라는 자신에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 기억, 그에 따라 변화된 생각, 행동, 사람들과의 관계를 담고 있는 것이 '나' 혹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불변하는 '나'는 없다
공간에 있는 물체, 즉 관계과 관련된 물질들이 고정되지 않고 변하듯이, 물 잔에 찻잎을 띠우면 찻잔이 되듯이, 내용물을 다 쓰고 비운 후,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듯이 사람도 시간에 따른 경험, 기억으로 조금씩 마음과 생각, 행동을 채우고 비움에 따라 변화합니다. 사람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을 인식하며 살기에 과거의 나는 항상 현재와 미래의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것도 자신이며 구분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불교에서 공 사상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모든 사람이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람 또한 만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성이 없는 '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정해진 답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안내문을 줄 뿐 그 뒤는 직접 생각하고 행동하여 깨달음을 얻으라고 합니다. 어차피 사람이란 답이라고 가르쳐줘도 스스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면 다시 원점으로 쉽게 돌아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저의 오늘 말도 하나의 생각일 뿐 답이 아닙니다. 이를 계기로 '나'라는 공간에 어떤 것들을 담기 나름이지요.
다만 전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공간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비우냐의 따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원하는 '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자질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화학도이기에 화학적 측면에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공 사상을 담은 반야심경에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구절이 있지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직역한다면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다'입니다. 여기서 색은 물질, 공은 우리 오늘 접한 공입니다. 여기서 저는 색이 실체로 보이는 입자로, 공은 파동으로 비유되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입자는 파동이요, 파동은 입자다.라는 말로 바꾸면 빛과 전자의 입자-파동 이중성처럼 들렸습니다. 마치 실체가 있다와 없다의 관계처럼 입자와 파동도 대치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빛과 전자는 이 대치되는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전자는 우리의 몸을 비롯한 만물을 이루는 원자의 구성요소 중 하나지요. 그러면 양자역학이 등장하고 초끈이론까지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발상에 그칠 뿐 뒷받침할 내용과 과학을 논하기에 실증적 요소가 없기에 글에서 빼버렸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단순한 공상 거리로 따로 적어본다면 조금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소재로도 괜찮을 거 같고요. 아!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0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무엇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간조차 없다는 의미는 null입니다. (하지만 null도 독일어로 0)
이러한 생각을 하다 월요일에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네, 변명이었습니다...... 소개글에는 자유롭게 업로드한다고 공지했지만 특정 요일에만 올리게 되네요. 글을 미루지 않기 위한 저의 최면이기도 하지만 혹시나 기다리시는 독자분이 계실까 봐 제가 그렇게 제약하게 되네요. 그래서 조금 고민이기도 합니다. 묶이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니깐요. 그래도 월요일 근방(?)에는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왠지 싫지만 그런 게 맞는 거 같아요.^^
저는 무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신보다는 한 사람의 스승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라기보다 사상으로 접하셨으면 하는데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오늘도 역시나 쉬운 내용은 아니라 머리만 아프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그래도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인생이기에 이를 계기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굳이 빨리 해결하듯이 하지 않으면 합니다. 천천히 조금씩이 더 좋을 거 같아요. 제가 화학도라 그리 생각해보는 것처럼, 프로그래머는 또 다르게, 건축학도는 또 다르게, 소년은 소년대로,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나름대로 자유롭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답은 없습니다. 답은 사라질 때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덤이 길었네요. 그만큼 할 말이 많은 소재였습니다. 담주는 쉬운 소재로 돌아오겠습니다. 제 글이 누군가의 좋은 인생에 연이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