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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Feb 18. 2022

대기업 보고문화는 무엇이 문제일까

보고문화 개선 프로젝트 후기(1)

보고문화 개선 프로젝트만 근 1년을 매달렸다. 프로젝트 진행이 외부 변수로 인해 중단되거나 딜레이 되면서 전체 기간이 길어졌다.(실제로 프로젝트에 투여한 시간은 6개월 정도다.) 덕분에 보고문화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어서 손을 떼게 되었는데, 1년 동안 고민한 내용이 휘발되는 게 아까워서 그동안 고민한 내용을 정리해본다. 보고문화는 수많은 직장인들을 괴롭히는 문제이다. 특히 대기업 조직문화팀이 주로 하는 단골 업무이다.(구성원들이 잊을만하면 다시 살아 돌아오는 도시괴담 같은 업무랄까) 나의 작은 경험담이 다른 조직문화 담당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왜 보고문화 개선이 중요할까


보고문화 개선에 주목했던 이유는 보고가 조직 내에서 '일상적'이며 '공통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매일 많은 시간을 보고서 작성과 보고에 쏟는다는 점에서 일상적이고,  한 두 명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 사무직 구성원 대부분이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조직 내에서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보고'라는 행위가 효율화된다면 그것만큼 큰 임팩트가 있을까?'라고 가설을 세우고 접근했다. 조직문화 진단을 통해 보고문화 개선 필요성이 강하게 발견된 것도 보고문화 개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프로젝트 실행에 앞서 사전조사를 해보니 보고문화 개선은 내가 처음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회사 내에서 보고문화 개선을 실시했던 역사가 길었다. 근 10년 동안 각종 캠페인을 실시하고 인쇄물을 제작했다. 문제는 주로 인식개선 차원에서 접근하다 보니 별다른 강제력이 없었고 실제로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보고문화 개선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니 회사를 오래 다닌 옆 부서 부장님이 한마디를 보탰다. "야 그거 되겠어? 어차피 안 돼" 보고문화 개선은 '해봤는데 어차피 안 돼'의 대명사 같은 일이었다. 그 말을 듣고는 내 안의 버튼이 눌렸다. 무조건 바꾸겠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해보기 전에 안 된다고 하지 맙시다 쫌


보고문화는 무엇이 문제일까


도대체 보고문화의 어떤 점이 구성원들을 괴롭히는 것일까? 보고라는 행위를 놓고 도대체 어떤 현상들이 생기고 있는지 구성원 FGI를 실시했다. 구성원들이 말하는 보고문화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았다.


보고서 1회 작성 시 분량이 과도하게 많다. 

보고서 형식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최종보고 완료까지 보고서의 방향성이 자주 바뀐다.

출력물을 동반하지 않고 보고할 수 없다.

보고 중요도를 고려해서 보고 수단(구두, 메모, 서면, 이메일 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보고 단계가 많아서 최종보고 완료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대면 보고 외 비대면 보고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얼핏 보면 문제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크게 4가지 원인에 의해 위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봤다. 4가지 원인은 '실행이 아닌 계획 중심의 업무 방식', '격을 중시하는 위계적인 문화', '오프라인·아날로그 친화적인 보고 환경', '비효율적인 계단식 보고 단계'다. 하나씩 자세히 알아보자. 


원인① '실행'이 아닌 '계획' 중심의 업무 방식

[결과]  
- 보고서 1회 작성 시 분량이 과도하게 많다. (보고서 분량의 문제)  

여러 종류의 보고서 중 분량이 많은 보고서는 주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계획' 보고서다. 신제품 출시 계획, 사업 계획, 프로그램 운영 계획 등등. 새롭게 시작하는 업무이다 보니 보고를 받는 상대방은 이 업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없다. 머릿속에 이 일에 대한 그림을 새롭게 그리기 위해 각종 정보들을 담다 보니 보고서가 무거워지기 쉽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보고서에 담을 것인가'이다.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 다만 회사가 중요시하는 가치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특히 '계획과 실행 중에 무엇을 더 우선시할 것인가'에 따라 보고서의 양이 확연히 달라진다. 계획을 중시하는 회사는 보고서를 통해 새로운 프로젝트의 A to Z을 자세히 알 수 있어야 한다. 계획이 통과되지 않으면 실행 또한 할 수 없기에, 우선은 계획을 잘 세우는 사람(=보고서 잘 쓰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장표는 많아지고 실행은 늦어진다.     


실행을 중시하는 회사는 계획을 통해서는 핵심적인 사항만 합의하고 나머지는 진행하면서 맞춰나간다. A to Z까지 보고서에 담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A, B, C 정도만 보고서에 담는다고나 할까. 계획을 세우다 실행하는 타이밍이 늦어지는 걸 극도로 꺼려하기에, 오히려 계획만 죽어라고 세우는 사람은 일 못하는 사람이 된다. 보고서는 서로의 의견교환을 위해 꼭 필요한 정보만 담긴다. 상대적으로 보고서가 가볍다.


우리 회사는 철저하게 계획을 중시하는 회사다. 제조업이라는 업의 특성상 한번 물건이 만들어지면 되돌릴 수 없기에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원인②  '격'을 중시하는 위계적인 문화

[결과]
- 보고서 형식을 지나치게 중시한다. (보고서 형식의 문제)  
- 보고 중요도를 고려해서 보고 수단(구두, 메모, 서면, 이메일 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보고 수단 다양성의 문제)   

가상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 


먼저 동료에게 업무상 필요한 정보를 공유할 때를 떠올려 보자. 상황에 따라 메일로 공유하기도 하고 메신저로 공유하기도 하고 급할 때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종이에 손으로 휘갈겨서 전달하기 한다. 만약 별도의 문서를 만들어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면 상대방의 이해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으로만 디자인을 해서 전달한다.


이번에는 똑같은 정보를 상사에게 보고한다고 생각해보자. 일단 동료에게 정보를 공유할 때보다 신경 써야 하는 게 많다. 만약 보고문화가 좋지 않은 회사라면 동료에게 편하게 전달했던 정보를 일정한 형식을 갖춘 보고서를 만들어서 상사에게 전달하게 된다. 동료에게는 메신저를 통해 가볍게 전달했던 내용도 왠지 한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서 직접 출력해서 보고해야 할 것만 같다.  


가상의 사고 실험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리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똑같은 정보를 전달해도 수직 관계인 상사에게 전달하느냐, 아니면 수평 관계인 동료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똑같은 정보도 상대방과의 관계(수직 or 수평)에 따라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위계적인 상하관계가 보고문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인③ 오프라인·아날로그 친화적인 보고 환경

[결과]  
- 출력물을 동반하지 않고 보고할 수 없다.(보고 수단의 문제)  
- 대면보고 외 비대면 보고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보고 방식의 문제)  

우리 회사의 기본적인 보고 풍경은 '종이 보고서를 출력해서 직접 상대방과 대면해서 보고'하는 모습이다. 보고에 참여하는 사람 수가 N명이면 N개의 보고서가 필요하다. 덕분에 우리 회사 프린터기는 쉴 새 없이 종이를 토해낸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이면 임원 사무실 한쪽에 보고서가 수북이 쌓인다. 보고가 끝나고 출력했던 보고서를 문서 세절기에 넣으며 나무에게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항상 출력물을 동반해서 보고해야 하는 건 그것 밖에는 보고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출력하지 않고 노트북을 가져가서 함께 자료를 보기에는 노트북 모니터가 너무 작았다. 대면하지 않고 이메일로 자료를 주고받기에는 사내 이메일 시스템이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만들었다면 출력해서 다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철저히 오프라인·아날로그 친화적인 보고 환경이었다. 


원인④ 비효율적인 계단식 보고 단계

[결과]   
- 최종보고 완료까지 보고서의 방향성이 자주 바뀐다. (보고 방향성 합치 문제)  
- 보고 단계가 많아서 최종보고 완료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보고 단계의 문제)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게임을 아시는지. 먼저 1번부터 5번까지 5명의 사람이 귀를 막고 일렬로 죽 늘어선다. 1번 주자에게만 단어가 공개되고 1번 주자는 이 단어를 2번 주자에게 설명한다. 2번은 3번에게, 3번은 4번에게 설명한 끝에 마지막 5번이 정답을 외치고 자신이 들은 단어를 말한다. 당연히 다들 귀를 막은 상황에서 단어를 주고받았기에 1번 주자가 말했던 단어는 5번까지 오면 전혀 다른 단어가 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되고, 바나나가 사과가 된다.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정보가 왜곡되는 현상이 생긴다.  


'가상계좌'가 '화가 나서'가 되는 매직


계단식 보고 단계를 가진 조직에서는 '고요 속의 외침' 같은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실무자는 A를 기획했지만 부장 단계에 올라가면 A'가 되고, 실장 단계로 가면 A'+B가 되고, 본부장에게 올라가면 A'+B+C가 되었다가 사장 보고에 들어가면 'A가 낫지 않아?'라고 하는 식이다. 보고서의 방향성이 처음과는 달라질 뿐만 아니라 각 단계를 올라가면서 시간이 불필요하게 많이 소비된다. 이 과정에서 실무자는 보고서의 버전을 무한히 늘려가고 몸과 마음은 점차 지쳐만 간다. 


계단식 보고 단계가 유효하려면 각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내용이 디벨롭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단계가 병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보고를 받는 사람이 별다른 영양가 있는 피드백을 주지 못하거나, 오히려 딴지를 거는 식이다. 한 임원은 '보고 단계가 오히려 노이즈를 만든다'라고 하기도 했다. 각 단계의 리더들이 특별히 잘못했다기보다는 단계가 많아지면 앞서 말한 고요 속의 외침처럼 정보가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할 확률이 구조적으로 높아진다. 


보고문화는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우리 회사 특유의 보고문화가 만들어낸 현상과 원인을 분석하다 보니 왜 보고문화가 바뀌기 어려운지 알 수 있었다. 보고문화는 보고문화라는 하나의 단어로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이 문제를 파면 팔수록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아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리해서 이 문제를 한 번에 소화시키려다가는 내 배가 먼저 터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회초리 다발 뽀개기' 전략이었다.


문제가 복잡하고 거대할 때는? 쪼개서 각개격파 하자. 언젠가는 다 뽀갤 수 있다. 

어렸을 때 회초리 하나는 쉽게 부러지지만 여러 회초리를 뭉쳐서 다발로 만들면 부러트리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보고문화라는 복합적 현상이 부러트리기 어려운 회초리 다발 같다고 생각했다. 여러 문제들이 얽히고설켜서 아무도 쉽게 부러뜨리지 못하는 복잡한 회초리 다발. 전래동화에서는 하나는 약하니까 뭉쳐야 한다는 교훈이었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뭉치면 강하니까 하나씩 나누어서 각개 격파하면 결국에는 큰 다발 전체를 뽀갤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보고문화의 원인과 결과 중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과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을 나누고, 당장 할 수 있으면서 비교적 구성원의 체감도가 클만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단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었는데 과거에 했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강제력이 없는 캠페인을 통한 인식개선으로 접근했었다. 나는 철저하게 환경과 프로세스 개선으로 접근했다. 그래야만 바뀐다고 봤다. 


*덧붙이는 말

보고문화의 각종 문제점과 원인을 1:1로 매칭했지만 현실은 정확히 1:1 매칭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격을 중시하는 위계적인 문화가 보고서의 양을 늘리는데도 영향을 준다. 위와 같은 문제점과 원인 분석은 무질서한 현상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가려는 노력 정도로 이해하는게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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