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내 나이 때 나와 내 동생이 여섯 살, 네 살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는 서울교대를 졸업한 초등학교 음악 선생님이었다고 하는데, 동생을 낳고는 그만뒀다. 언젠가까지 엄마의 초등학교 명예퇴직 기념비는 화장실 찬장에 놓여있었다. 나는 변기에 앉아있을 때마다 그 기념비를 꺼내와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주름 하나 없는 날씬한 서울 처녀이던 엄마의 결혼사진과 지금의 엄마 사이의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그 간극 속에는 가족을 위해 갈아 넣어지고 구겨져 버린 삶이 있다. 가족을 꾸릴 자격이 없었던 아빠, 그마저도 열심히 벌어오던 돈을 아파서 못 벌게 된 아빠, 어려서부터 몸이 아팠던 동생, 어린 막내 동생, 못된 나. 불행하고 어두운 우리가 그나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가끔 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내가 중학교 때 입던 티셔츠를 입고 있다. 약지 못하고, 자기 잇속 못 챙기고, 어디 가서든 허허실실 남 좋은 소리만 하는 엄마. 돈이 있어도 뭘 사야 할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아무 취향도 빛깔도 남아있지 않은 엄마. 남들처럼 세련되고,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명품백에 좋은 코트 하나 정도는 걸치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몇십 년 전 시장에서 산 옷을 입고 버스에서 내리는 힘없는 엄마를 보면 마치 이 세상과 혼자만 동떨어져 살고 있는 것 같아 아득한 기분이 든다. 자신을 위해 산 적이 없기에 또래보다 열 살은 늙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요즘에는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렇게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안간힘을 써봐도 가끔 바라본 내 얼굴에는 젊은 시절 사진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