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아가는 중 입니다.
'탁'
그대로 모니터를 닫아 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진도하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제 역할을 해내는 것 같았다.
"피곤해?"
진도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는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괜찮아."
"그럼 뭐 좀 먹을까?"
"아니, 배 안고파"
"그럼 잠깐 걸을까?"
"음... 일 하던거 괜찮아?"
"일? 이거야 내일 하면 되지. 나가자 우리."
혹시 내 부족한 마음이 들킬까 두려웠다. 더 매력적인 여자로 보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너무 빨리 드러나는 것 같아 초라했다.
"걷자 우리."
진도하는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리곤 어느새 내 가방을 챙겨 들었다.
"무겁네, 걷는 동안만 내가 들어줄께."
그는 늘 이렇게 세심하게 살피며, 과하지 않게 나를 지켜준다. 그 마음이 고맙지만, 동시에 언젠가 사라질까 두렵기도 했다.
'띠링'
커피숍 문을 열고 나온 강남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미 퇴근시간은 지났는데도, 모두가 이유 있는 듯 바빠 보였다.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우리 오늘 여기 가보자.”
그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한강공원.
“지금?”
“응. 지금. 저기 택시 왔다.”
도착한 택시에 올라타는 순간, 늘 정해진 틀 속에만 있던 나는 낯선 경로이탈에 당황했다.
그런 나를 보며 진도하가 웃었다.
"콧바람 쐬는 거야. 오늘은"
"그래 좋다."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 하지만 그가 곁에 있기에 두렵지 않았다.
곧 한강에 닿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지만, 밤의 한강공원은 처음이었다.
어째서 한 번도 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이곳은 마치 다른 나라 같았다.
"와, 시원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린다.
"마음에 들어?"
바람을 느끼며 감탄사를 쏟아내는 나를 보며, 진도하가 묻는다.
"응. 완전!"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셔서요."
어쩐지 깍듯한 말을 건네는 그에게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래, 도하야. 누나를 위해서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누나라는 호칭은 진도하가 나의 것 중에서 유일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 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에 기분이 풀린 나는 그를 놀려 보려는 심산으로 던진 말 이었다.
"네, 누나. 이 맛에 누님들이 연하남 키우시죠."
생각지도 못 한 진도하의 대답이었다. 보름달 보다 동그랗게 떠진 내 눈에 진도하의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이 떠나가라 한바탕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눈물이 다 찔끔 났다.
"저는 제비는 안 키우는데요."
"사모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말도 안되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나는 한바탕 마음을 털어 내었고, 덕분에 좀 전에 기분은 말끔히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우리 저기가서 좀 앉을까?"
불편한 마음을 모두 털어버리고 난 후, 진도하가 조심스레 묻는다.
잔디밭 위에 놓인 벤치 하나가 적당 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응 좋아."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조용히 벤치에 앉았다.
그저 물이 흐르는 대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인데도, 마음과 몸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좀 전의 업무에 열중하는 진도하를 보며 가졌던 옹졸한 마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이번엔
용기내어 말 할 수있을 것 같았다.
"있잖아. 아깐 너가 너무 부럽더라."
"나? 내가 왜?"
"너는 너의 일을 시작 했잖아. 좋은 사수도 있고, 뭔가 멋져 보였어. 하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이렇다할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여지껏 뭐 했나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잔잔한 물결에 마음을 올려 흐르는 대로 그에게 전했다.
"나는 그 반대인데, 나는 너가 멋져보여."
"나? 내가?"
"응, 누난 말이야. 포기 하지 않잖아. 쉽게 가려 하지 않고, 돌아가려 하지 않잖아."
"내가?? 내가 그런가?"
"응, 내가 본 누나는 그래. 모르면 배우고, 알려하고. 혼자지만 뭐든 해 보려 하고. 그게 멋지다고 생각 했어.
나는 지금껏 가르치면 배우고, 시키면 했거든. 주도적이지 못했달까? 그래서 내가 본 누난 정말 멋졌어."
"몰랐어.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다니.. 근데 이제 누나라고 하기로 한거야?"
진도하가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리곤 두 손이 살포시 나의 양 볼을 감싼다. 살그머니 힘이 들어간 그의 양 손이 내 볼을 지그시 누른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대로 내 입술은 옴짝 한다. 나도 모르게 눈이 살포시 감겼다.
주변은 아득하고, 고요하다. 더위를 몰고 간 바람이 일랑이고 머리칼이 살랑인다. 나부키는 머리칼 때문인지
아님, 지긋한 그의 손 때문인지 마음이 자꾸 간지러워 눈을 뜰 수가 없다. 그저 이 순간이 너무 마음가득해서
좋을대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 역시 같은 마음이라 생각 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누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되요."
"야아아아아!!!!"
끔찍한 소리에 눈을 떳을 때, 진도하는 신나게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 나고 있었다.
"좀 걷자,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