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하지 못한 이야기 Ⅰ

- 물 침대와 돌 침대

by 그래

이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빠에게 건네는 지독한 이야기.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잊지 못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우리 가족은 생전 처음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다. 여행을 어디로 갔는지, 같이 간 가족은 누구인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이 선명하다.

그곳은 어두웠고, 뭔지 모를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어른들은 가족끼리 혹은 서로 어울려 삼삼오오 모여 술을 기울였다. 멀뚱히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엄마, 아빠와 함께 숙소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음악에 고개를 들었을 때, 함께 있던 엄마가 같이 없다는 걸 알았고, 나는 엄마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내, 낯선 아저씨와 춤을 추고 있는 엄마를 발견했다.


나는 엄마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엄마의 손목을 잡아끌고 나왔다. 주변의 어른들은 나를 보며 깔깔 웃고 박수를 치며 웃었지만, 나는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어디가 웃음이 나고 박수를 칠 일인지 따져 묻고도 싶었다. 씩씩 거리며 화가 난 내 모습에 엄마는 이내 당황하시며 달래기 바쁘셨다. 그리고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을 때,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내가 다 봤어!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내가 뭘?!"

"아주 그 사람 많은 데서 엉덩이를 주무르고.... 애들까지 있는데서 내가 진짜 창피해서"

"내가? 내가?!! 쌩 사람 잡지 마! 당신이야 말로 어떤 놈이랑 춤을 추고 논거야?"

"웃기지 마! 난 당신이랑 달라"


분명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눈물이 흐른다. 뭔지 모를 불안함과 불쾌함이 이제야 무엇인지 알았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한 여행은 사실은 가족이 함께 할 여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빠의 사랑이 찢어지고 있었고, 엄마는 위태롭게 그 사이를 붙들고 있었다. 어린 나는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흔들리고 있는 나의 부모에게 엄마, 아빠를 외칠 수 없었다. 나를 부정할까 무서웠고, 그 사랑이 가짜였다고 고백될까 겁이 났다. 그렇게 두 눈을 꼭 감은 채, 어서 아침이 되기만을 바랬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의 전쟁 같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기 때문에 낮에 집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늘 열쇠를 두었 던 화분 밑이 텅텅 비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현관문을 잡아 끄니, 힘 없이 문이 열린다.

'혹시 엄마인가?' 마음이 두근댄다. 엄마는 대단하다. 텅 비어 깜깜했던 집에 엄마만 있으면 빛이 나고 꽉 찬다. 좋은 향기도 솔솔 나는 것 같고 말이다. 엄마가, 엄마가 집에 계셨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안방 문 틈으로 삐집고 나오는 목소리는 아빠였다.

"하하하하하, 아니지 여기는 물 침대. 당신은 돌 침대."


지난번 가족여행에서 엄마, 아빠가 엉덩이를 만졌네 안 만졌네 하면서 싸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로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를 오해하고, 아빠는 엄마를 오해하고, 엉터리 오해만 풀어주면 해결될 일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통화에 오해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단번에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저 말 뜻을 단번에 이해 한 건 나도 참 슬프다. 차라리 어리숙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면 좀 더 행복하게 유년 시절을 보냈을 텐데.... 그러기엔 나는 그날의 일은 엄마의 오해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 쉽게 깨달아 버렸다.


인기척이 느껴진 걸까? 아빠가 전화를 황급히 끊고 나온다.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고,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지만 어린 나는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어야 할지 아무런 감이 오지 않았다. 그저 학교에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어린 초등학생 여자아이로만 남아야 했다.


다음 날, 똑같은 시간, 학교를 마쳤다. 오늘은 집에 가기 싫다. 혹시나 아빠가 빈 집에 누워 또 전화통화를 하고 있음 어쩌나 그 모습을 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안된다는 친구의 옷자락을 잡고 조르며 학교 끝나자마자 친구네 집을 쫓아갔다. 몇 명의 친구들도 덩달아 그 친구네 집에 갔다. 친구네 어머님은 약속도 없이 찾아온 초등학생 무리에 좀 당황하신 듯하였지만, 이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친구네 집은 신축빌라였다. 말끔한 계단에 커다란 창에선 햇빛도 따스히 비춘다. 친구를 따라 방에 들어가니, 하얀 이불이 폭신폭신 구름처럼 깔려 있다.

"나 여기 누워보면 안 돼?"

"안되는데.... 그럼 잠 깐 만이다?"

"응"

친구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침대에 누워 하얀 벽지가 말끔히 발라져 있는 천장을 바라봤다. 친구의 침대는 부드러웠다.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침대는 꼭 내가 누운자리 만큼 나를 감싸 안았다. 나를 제일 사랑한 아빠가 말한 침대는 틀렸다. 그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순간, 그날처럼 눈을 감았는데 눈물이 흐른다.

"왜 저래...?"

불만 섞인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한탄했다. 본인의 애정 어린 공간에 드러눕고, 이유 없이 울기까지 하니 짜증이 날만도 하다.

"이제 일어나"

친구의 타박 섞인 소리에,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마땅하지만, 당시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눈물을 숨기기 바빠서 인사도 못한 체, 허겁지겁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기억이 있다.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땐, 나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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