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환자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1
나의 첫 환자는 준수한 외모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학생이었다. 환아는 어릴 적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 적어도 내가 환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조금 불안하였고 그러다 언젠가 마음이 울적해졌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서 환아의 감정은 더 불안정해졌고 결국에는 깊은 우울감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중 어느날 환아는 돌연 변했다. 연락을 하지 않던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여러가지 일들을 벌였으며, 집에서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조증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우울증은 일상 생활을 할 수 없고 삶을 마감하게 할 만큼 심각한 질환으로 여겨지지만, 조울증은 그저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2 허나 실상은 다르다. 조울증의 예후는 우울증보다 더 좋지 않다. 결국 환아는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난폭한 행동을 하였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다 결국에는 병원에 왔다.
병원에서 만난 환아는 차분한 상태였다. 이미 감정의 격동은 지나갔고 약물은 환아가 조금 더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처음 마주한 환아는 감정 표현이 거의 없었고 주로 묻는 말에만 간략하게 “네”라고 답하였다. 나는 환아와 어떤 공통의 관심사가 있을까 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할 스포츠나 컴퓨터 게임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지만 환아는 큰 관심이 없었다. 감정 표현도 별로 없고 시종일관 단답으로 짧게 답했던 친구라, 나는 대화를 나누는 게 쉽지 않겠다 싶어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나 해 주어야겠거니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환아가 문학 이야기에 반응을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환아는 대단한 문학소년이었다. 반갑게도 환아는 나와 같이 고전 작가들의 예스러운 문채에 관심이 많았고, 우리는 그날 제법 오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다음날 아침, 병동에 갔더니 환아가 내게 불쑥 공책을 내밀었다.
“선생님, 글도 쓰신다고 했죠? 그러면 제 글도 한 번 봐주세요.”
그 공책은 의료진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공책을 건네받아 첫 장을 펴고 글을 읽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첫 장에 있었던 글은 본인의 감정에 대한 일기였는데, 그 글에는 조증의 황홀감과 이후 다가올 울증에 대한 불안함이 상당히 문학적이고 관찰력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3 나는 정신과학 강의 어디서도 그러한 묘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실존을 위협하는 주체할 수 없는 황홀감. 그리고 그 끝에서 어렴풋이 손을 뻗치고 있는 절망의 절벽. 이런 감정들이 바로 조울증이구나.’
아쉽지만 환아의 문장들을 그대로 이 글에 옮겨 적을 수는 없다. 그 글은 오롯이 환아의 것이므로 내가 마음대로 차용하여서는 아니 될뿐더러 내게는 그러한 표현을 흉내낼 만한 문학적 감성이 있지도 않다.
환아는 주로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한번에 쭉 이어서 글을 쓴다고 하였다. 지렁이 같이 흘러가던 환아의 필채를 보아도 그 말은 거짓이 아닌 듯 싶었다. 나는 글을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은유들을 질문하였고, 환아는 더러는 설명을 해 주고 더러는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하였으며, 또 더러는 내 해석을 듣고 “아, 그런 감정이었던 거 같아요”라고 이야기했다. 내게 글은 숙고와 교정의 과정이지만 환아에게 글은 격동하는 감정이 분출되는 창문이었다.
나는 환자와 헤어지고 보고서를 썼다.
Dx: Bipolar disorder, current episode depressive. (진단: 양극성징애, 현재 우울 삽화)
Mood: euthymia (기분: 평상 기분)
Affect: sl. depressed and restricted. (정동: 다소 우울하며 제한된 감정 표현)
* Mood는 환자가 스스로 이야기한 본인의 기분을 의미하며, affect는 관찰자가 관찰한 환자의 기분을 의미한다.
불쑥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표현들로 환아가 가진 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 시절의 정신의학은 마치 소설을 쓰는 것처럼 환자의 병력을 기술하였다. 은유적이고 시적인 표현들로 환자의 정신 세계를 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점차 근거중심적인 의학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프로이트의 방법론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이라고 하는 도구적 진단 체계가 개발되면서 정신의학은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의 역사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의학의 중요성과 비약적인 발전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의학은 과학이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공공의 주제로서 논하기 위해서는 용어의 명확한 정의와 특정 사실을 지지하는 근거들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DSM이라고 하는 체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과거 정신의학에서 볼 수 있었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가 바라본 이중섭의 감정은 어떠한 색이고, 어떠한 온도였으며, 어떠한 질감이었을까.
내가 만난 환아의 머리 위로는 작열하는 소행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1.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中
2. 정식 명칭은 양극성장애이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조울증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므로 여기서는 조울증이라고 이야기하겠다
3. 조증은 필연 우울감을 동반한다. 이를 몇 번 경험해 본 어느 환자는 내게 “조증이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아요. 곧 추락할 걸 알거든요”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