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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18. 2021

우리 병원에는 맹꽁이들이 많다

맹꽁이

무언가를 알고도 모르는 척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어색하게 관리가 안 되는 표정과 멋쩍은 웃음, 그리고 내뱉는 말과 머릿속 생각이 다른 데에서 오는 묘한 죄책감. 별 일이 아니어도 그렇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가 많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면 애써 모르는 척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 일이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무언가 상대를 속이고 있는 기분도 들고, 내가 말을 하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래도 신의없는 배신자보다는 소문에 느린 맹꽁이가 나으니까, 두 눈을 꿈뻑꿈뻑하며 모르는 척하고 있다.


비뇨기과 실습을 돌며 방광경실에서 내시경 참관을 하던 날이었다. 방광경은 가느다란 내시경을 요도로 삽입하여 방광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보는 시술이다. 대학병원에서는 주로 소변에 피가 섞인 혈뇨를 본 후에 혹시 요도나 방광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가장 중요하게는 암이 있는 것은 아닌지 감별하기 위해 흔히 방광경을 사용한다. 쇠로 된 관이 요도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한창 환자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하고 있던 중, 한 할머니가 검사실에 들어왔다. 꼭 평온한 언덕에 눈이 내린 것처럼 차분한 얼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온화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듯 보였다.

   '할머니도 시술이 무서우시구나...'

검사를 시행할 전공의 선생님도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의식했는지 시술에 대해 설명하며 할머니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시술은 2~3분 정도밖에 안 걸릴 거예요. 그리고 들어다가 조금 아픈 구간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구간 한 번만 지나면 별로 힘들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최대한 안 아프도록 노력해 볼게요. 너무 걱정마세요."

전공의 선생님의 설명히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머니가 나즈막히 답했다.

   "혹시... 암은 아니겠지요?"

할머니가 무서웠던 건 그 짧은 시술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소변에 피가 흥건하게 섞여 나왔고, '혹시 모르니' 검사를 조금 해 보자는 교수님의 말씀에 검사를 예약 해두긴 하였으나, 그후로는 불안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전공의 선생님은 차분히 답했다.

   "저희가 한 번 살펴보아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시술대에 누웠고, 할머니에게는 아득히 길었을 준비 시간이 끝난 뒤, 드디어 할머니의 요도를 통해 방광경이 삽입됐다. 방광경은 '아아'하는 할머니의 짧은 신음소리를 뒤로 한 채 재빨리 방광에 도달했다. 방광에는 산호초처럼 신비로운 모습으로 자란 덩이가 있었다. 교과서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의 명백한 암이었다. 전공의 선생님은 방광경을 통해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약속대로 빠르게 시술을 끝냈다. 시술이 끝난 후 이제 기다리셨다가 교수님의 진료를 보라 안내를 드리는 전공의 선생님에게 할머니가 물었다.

   "혹시 암인가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학생의 눈으로도 명백히 보이는 암덩어리를 전공의 선생님이든, 간호사 선생님이든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암환자라는 꼬리표를 물려주며 이제부터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살도록 하는 그 절망의 말은 차가운 검사실에서 쉽게 건넬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교수님께 보냈으니, 교수님께서 잘 보시고 설명해드릴 겁니다."

전공의 선생님은 애써 모른 척 답했다.


알아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다 안다. 나도, 간호사 선생님도, 전공의 선생님도. 하지만 찰나의 가벼운 말로 얼버무리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순간이기에, 어떻게 말을 전하는지에 따라 삶에 대한 환자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이기에, 모두들 모른 척한다. 두 눈을 꿈뻑꿈뻑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맹꽁이처럼.


우리 병원에는 맹꽁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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