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해먹에 누워 오늘부로 새 이웃이 된 옆방 남자와 사이좋게 비어 라오 한 병을 마셨더니 솔솔 잠이 오지 뭔가!
-그 남자 아직도 그물 꿰매고 있디?-
-응, 물건 팔기 싫은가 봐-
마을 입구 슈퍼에서 맥주 한 병을 사는데도 꽤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곳, 므앙응오이 누아. 옆 방 남자가 지구 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는 므앙응오이 누아에 관광객이 늘고 게스트 하우스가 한 채 두 채 늘기 전부터 이곳에 자주 왔었다고 한다. 다시 떠났다가 또 돌아오길 반복하는 모양이다. 방랑자의 관상이다. 저렇게 생긴 사람들은 꼭 방랑자로 살더라. 목이 늘어난 민소매 티셔츠와 낡은 반바지, 방랑하는 사람들은 길 위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해보고 싶어 짐을 간소화하여 길을 나섰는데, 왜인지 치앙마이와 루앙프라방의 야시장에서 세탁할 때마다 물이 잔뜩 빠지는 바지만 여러 벌 사고 말았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해먹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햇살이 너무 따가워 눈을 뜨니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벌써 들어가 잠을 자는 모양이다.
얼굴에 물기를 좀 씌어주고 모기장 안으로 기어 들어가 선풍기 바람을 쐬며 잠이 들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이름 모를 향기는 맘에 들지 않지만 하루 숙박비 6천 원짜리 방이니 적당히 만족해야 한다. 조금 덥지만 꽤 깊이 아주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얼굴에 선풍기 바람을 외앵하고 쐬며 잠을 자는 것 또한 오랜만이었다. 몇 시간쯤 잤을까, 자스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헤이, 깨우려고 노크도 하고 불러도 봤는데 대답이 없어서 닝닝에 와 있어'
지금 가겠다는 메시지를 얼른 보내고 열쇠와 지갑을 챙겨 닝닝으로 향했다. 어제 점심을 먹은 식당이다. 스프링롤이 무척 맛있다는 자스민의 얘기에 나도 오늘은 같은 메뉴를 주문해 보기로 한다.
한 무리의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낯익은 두 사람이 섞여 있다. 농키아우로 오는 밴에서 잠깐 인사를 나눈 부부였다. 그밖에 한 남자는 스패니쉬 기타를 치고 두 청년은 신나서 춤을 추고 여자는 한송이의 꽃처럼 스스로 빛내고 있다. 기타를 치는 남자의 눈이 줄곧 그녀를 향해 있었다. 부부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자 자신들의 테이블에 같이 앉자며 우릴 초대했다. 자스민은 벌써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의사를 물었다.
-Shall we?-
-와이 낫?-
밴에서 만난 사람들은 스위스 부부로 여행 블로그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자스민과는 사진과 카메라, 여행 블로그 등, 공통점이 많아 다양한 이야길 주고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전혀 싫지 않았으나 가끔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멋진 색채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색은 조금 흐려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불어로 대화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거라곤 조각난 몇 개의 단어들 뿐이었다. 내일 해가 뜨는 시간, 구름의 위치, 산의 뷰 포인트, 조각조각 알아들은 그 단어만으로 그들의 대화에 무리하게 끼어든다면, 내입 속에서 나온 말은 무엇이 되었든 갈피를 잃고 떠도는 말이 될 것 같다. 마치 유채화를 그리려고 준비한 강렬한 총 천연색 팔레트에 화가가 실수로 잘못 짠 허여멀건 수채화 물감처럼, 주워 담고 싶어 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그들 사이에 지긋히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깊숙이 숨지 못하도록 짬짬이 나를 깨워 주었다.
한 바탕의 수다가 오가다 짬이 생기면, 스위스 포토그래퍼 올가의 남편은 내가 원한다면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있도록 영어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말해주었다. 그가 영어로 대화의 흐름을 바꾸면 다른 사람들도 다시 영어로 대화를 이어 주었다. 나의 색채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은 것 같다.
주문한 스프링 롤이 나왔다. 곱슬머리 큰 청년이 내 접시에 반응을 보였다.
-먹을래?-
-와! 진짜? 그래도 돼?-
저렇게 좋아하는데 누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4개의 스프링 롤 접시에서 하나를 든 청년이 친구와 나누어 먹겠다고 하고, 기타리스트 청년도 옆자리의 아가씨와 나누어 먹겠다고 했다. 2개가 남자 올가와 그의 남편은 정중히 사양해 주었다. 튀기지 않은 베트남식 스프링 롤을 여행 중 아주 오랜만에 발견한 자스민은 냉큼 주문을 했고, 굉장히 괜찮은 스프링롤이라며 내게도 권했으나, 어제의 나는 화장실에 가는데 너무 지쳐 그닥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벼르다가 주문한 것인데,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스프링 롤이 아닌가! 너무 맛있어서 2개를 다 먹은 후엔 아쉬워서 슬퍼질 지경이었다. 한 접시에 3천 원, 저렴한 가격이지만 더 주문할 돈은 부족했다. 내일 농키아우로 돌아갈 뱃삯, 아침밥, 루앙프라방으로 돌아갈 버스비까지 딱 간당간당하게 남은 것이다. 그런 내가 척 보기에도 배가 고파 보였는지 올가 아줌마는 반토막의 식사를 마친 나에게 바나나 잎사귀에 담긴 볶음 국수를 내밀었다.
-먹어 봐, 오늘 장이 열렸길래 가서 사 온 거야-
손으로 몇 가닥을 집어 너무도 맛있게 먹는 아줌마를 보니 안 먹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와 같은 여행자들을 좋아한다.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호화로운 만찬처럼 음미하며 즐기고, 뷰가 있는 작고 아담한 게스트 하우스에 머문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서가 결코 아니다. 천천히 스며들어 자극하지 않고 만끽하는 것이다. 므앙응오이 누아에서는 그러한 방법이 더욱 잘 어울리므로.
우리는 밤이 깊어가도록 작은 원탁에 옹기종기 끼여 앉아 여행과 자아,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여행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정이 넘어 올가 부부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고, 나와 자스민도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들은 자스민을 기억할 것이다. 밝고 강한 색채를 뿜어내는 그녀를.
그리고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길 위에서, 어느 심심한 곳을 지나갈 때 즈음 , 한 번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다. 흐릿한 색채를 지닌 나란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