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인사

"안녕, 무기력."

by 와리

“안녕, 무기력.”


어느 날 무기력이 나를 떠나갔다.


혹은 오래전에 무기력이 이미 나를 떠나갔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눈을 뜨자마자 신이 나서 깔깔거리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나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던 아침의 어느 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하는 희미한 위화감을 곰곰이 들여다보다 기억이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이 옆에 있었다. 그 시커멓고 무거운 기운을 일상 전체에 드리우고 내 모든 행동과 생각과 감정에서 기운을 앗아가고 있었다. 도무지 뚫을 수 없는 무감각의 장막을 드리우고 내가 삶의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을 훼방 놓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내가 알지 못했던 어느 순간 무기력은 나를 떠나고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런 지가 오래된 듯싶었다.



정확한 날짜를 짚어낼 수도 없었다. 그저 작년 이맘때 더웠던 계절에 가장 힘들었었던 것 같기도 했고, 찬 바람이 불어왔을 때 조금 나아졌던 것 같기도 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잠시 멈추었지만 조금씩 기운이 돌아올 때마다 부지런히 적었던 ‘아침에 쓰는 글’을 뒤적거린 끝에야 나는 무기력을 통과했던 내 여정의 일정을 대강이나마 맞추어 볼 수 있었다.


그럭저럭 시작과 끝을 더듬어 보니 나는 거의 1년 동안을 무기력과 함께 살았던 듯싶다. (듯싶다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은 나조차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기력의 들고 남은 아주 은밀해서 나는 그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다가올 때도, 사라질 때도. 마치 조금씩 하늘빛이 변해가다 어느새 깜깜해지는 것처럼, 온통 깜깜한 밤이었다가 어느새 하늘이 붉어지며 온통 한낮이 되는 것처럼. 나는 어둑해지던 하늘, 그 한순간의 하늘빛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깜깜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 어둠 속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밝아지던 어떤 순간의 하늘빛은 눈앞에 떠오르듯 생생했지만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날이 밝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는 온통 햇살이었다.



너무 오래 걸렸던 것 같기도 했고, 생각보다 쉽게 떠나간 것 같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예전에 번역을 검토했던 어떤 책이 있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겨우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들이 치료의 일환으로 우울증이 한창 심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쓴 편지들을 모아 놓은 서간집이었다. 편지들은 절실하고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과 충고의 말로 가득했지만, 나는 그 말들이 지금 우울증에 시달리는 다른 환자에게, 심지어 과거의 나 자신에게조차 가닿을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이미 고난의 시기를 다 겪고 어떤 형태로든 이겨낸 사람들의 말은 아무리 마음을 다해 건넨다 해도 지금 한창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법이다. 무엇이든 지나고 보면, 돌이켜 보면 추억의 색으로 한층 아름답고, 수월하게 보정되기 마련이니.



무기력의 시기를 무사히 건너온 경험을 엄청난 시련을 이겨낸 영웅담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다들 이렇게 이겨내면 된다는 교훈으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영웅담이며 교훈 같은 것을 믿지도 않는다. 이야기를 읽을 때도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고난의 모험을 응원하기는 하지만 항상 가장 궁금하고 가장 많이 되읽는 부분은 그 모험을 마친 영웅이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해서다. 주인공은 영광의 순간에 머무르며 과거와 추억에 매여 살았을까? 아니면 모험의 순간순간을 삶의 다른 모든 순간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변화하는 삶을 짓는 무수히 많은 토대의 일부로 삼았을까? 모험을 마친 주인공은 일상의 소소한 어려움과 마주했을 때 별 것 아닌 듯 쉽게 넘길 수 있었을까? 아니면 모험을 떠나기 전과 똑같이 힘겨웠을까?


무기력을 통과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무기력이 있든 없든 여전히 삶의 모든 순간을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맞이하고 온전히 음미하며 살려고 애쓸 것이다. 언젠가는 일상의 고마움을 잊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뜬 채 삶의 모든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또다시 몰래 내 옆으로 다가온 무기력에게 집어삼켜질지도 모르지만.


과거를 교훈으로 삼을 필요도 없고 미래를 미리 염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삶의 이 순간에 맞닿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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