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답장에 가슴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지만 앞으로 시부모까지 모시고 지내야 할 2박 3일을 생각하며 좋게 좋게 대답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 가는 길에 뭘 좀 사갈까?"
그렇게 돌아온 집. 시부모님은 매번 역귀성하실 때마다 본인들이 드실 음식 재료를 사들고 오신다. 올해 추석도 마찬가지. 과일도, 반찬도, 국거리도 모두 사 오셨다. 내가 미리 사다 놓거나 해놓는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 않으시고 본인이 챙겨 오신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 드시다 가시곤 한다. 그래서 더더욱 집에 미리 뭔가를 사놓지 않았다. 결국 다 남고 버려지는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퇴근하고 나니 저녁 7시 반인 상황. 시모는 저녁상을 모두 차려놓았다. 물론 내가 있었다면 거들며 요리했겠지만 난 분명 출근이라고 얘기했었고, 그런데도 그날 오셨으니 저녁식사까지는 챙길 여력이 전혀 안된다는 걸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난 죄인이었다.
그냥 죄스러웠다.
먼길 오신 시부모에게 저녁 한 끼도 못 차려드린 나쁜 며느리. 결국 그렇게 불편한 마음 한가득 안고 다 같이 앉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2박 3일 부엌데기 삶은 시작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밥 먹을 때를 빼고는 단 1초도 자리에 앉지 못했다. 식탁을 치우고,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고, 과일을 내어가고. 며느리와 다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댁이 진짜 존재하나 싶은 시간들. 그냥 마냥 난 부엌에서 일을 하고, 또 했다.
그래도 멀리서 오신 부모님 힘드셨을 테니. 아이들과 놀아주고 싶으셨을 테니. 그 마음 헤아리고 그냥 꾹 참고 웃으며 열심히 집안일을 했다. 다 하고 나니 10시가 넘은 시간. 씻고 애들을 재우러 들어가 그대로 기절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역시나 눈을 뜨자마자 밥을 안치는 걸로 나의 하루는 시작됐다. 부엌엔 아무도 와보지 않았다. 그냥 혼자 국을 데우고 생선을 튀고 불고기를 익히며 1시간 여를 열심히 상을 차렸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부터 물컵에 물을 따르는 일까지.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양, 난 그렇게 6 식구의 아침식사를 챙겼다.
"불고기도 구웠네"라는 시모의 말에 빙그레 웃는 것 역시 며느리의 일이다.
다 먹고 빠져나가니 식탁 위에는 또 한 차례 잔뜩 쌓인 설거지거리들이 모여있었다. 그나마 시모가 그릇들을 싱크대 옆까지 가져다주셔서 10분은 절약할 수 있었다. 물을 틀고 그릇들을 헹구며 거품을 냈다. 보글보글 거품이 그릇에서 씻겨나가는 걸 바라보며 그냥 이 시간도 모두 거품처럼 씻겨 내려가려니, 했다.
가족 모두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구경을 하고 점심은 간단히 밖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5시 반쯤. 난 이제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옷을 급히 갈아입고 양파를 썰고 상추를 씻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소고기를 구워 먹자고 한 날이었다. 한창 식사 준비를 하는데 시모가 "애들 먼저 씻기고 천천히 밥을 먹자"라고 했다. 남편은 차에서 잠든 둘째와 차에 있었고, 난 한창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첫째를 먼저 씻기라는 소리인가. 나보고? 애들 씻기는 것만큼은 남편이 하는 일이었다. 본인 아들이 전날 애 둘 다 씻긴 게 보기 싫었나 보다.
"어제 퇴근해 들어오는데 니 입술이 다 터서 안쓰럽더라"
나에게 한 이 말은 순 거짓말이었던가. 못 들은 척 부엌에 더 몸을 숨겼다. 요리하다 말고 애까지 씻길 순 없었다. 조금 있다 남편이 들어왔다. 나는 물틀어놨으니 애들 먼저 씻기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저녁 한 상이 차려졌다. 역시나 숟가락 놓는 것부터 전기 버너에 고기를 구워내는 것까지 온통 내 몫이었다. 가만히 앉아 밥숟가락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 시모는 맘에 안 드는지 한 마디를 던지셨다. 나에게 채끝살부터 구으라는 남편의 말에 덧붙여진 말.
"나는 니들 오면 꼭 등심 사다 구워 먹인다. 채끝살 같은 건 안 산다"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싱크대 곁으로 갖다 놓으려는 시모에게 내가 천천히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냥 두시라고. 그러자 "먹기만 하니 원 그래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냥 제가 한다고 했다. 애들이랑 놀아주시라고. 그냥 조용히 밀어냈다.
그때부터 미친듯한 편두통이 시작됐다. 머리가 천둥이 치듯 찌릿거렸다. 1분 간격으로 통증이 찾아왔다. 그때, 남편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려는데 그 모습을 본 시모는 "어디를 가냐"며 늦은 시간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본인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한가득 담아 소리치셨다.
두통이 너무 심하게 왔다고, 설거지 한 번은 남편에게 좀 하라고 말하고 싶던 게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통증을 견디며 고깃기름이 잔뜩 묻은 산처럼 또 쌓인 설거지를 꾸역꾸역 다 하자 씻고 나온 시모는 부엌을 보고 한 마디를 했다.
"말끔하게도 치워놨네"
다 싫었다. 다 그냥 다 싫었다.
침대에 그냥 누워 잠이 들었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자고 일어난 3일 차 아침인 오늘. 역시나 눈을 뜨자마자 전날 씻어놓은 쌀을 밥솥에 넣고 취사를 누르며 하루가 시작됐다. 오늘은 결혼기념일. 결혼 7주년인 오늘은 이미 나에겐 의미도 무엇도 없는 날이 되어있었다.
역시나 그 누구도 상차림조차 도와주지 않는 아침 준비는 김치찌개를 끓여내고, 감자를 볶아 내어 마무리했다. 머리는 여전히 1분마다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고, 통증을 참아내며 밥 반 그릇을 간신히 먹고 나니 이제는 첫째가 할머니네 가고 싶다고 난리를 부리고 있었다.
뭐든 다 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을 수밖에 없지. 어제부터 할머니네 갈 거라던 첫째의 말에 시부모는 "그래 그러자"며 농담처럼 듣고 넘기셨었다. 난 알고 있었다. 그 대답이 아이에겐 상처가 될 거란 걸. 못 갈건 못 간다고 말해줘야 아이가 실망하지 않는 건데, 그걸 가자 가자 하니 아이는 진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들떠있었다.
결국 시부모의 출발을 몇 시간 앞두고 아이는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보호자인 엄마가 허락해야지 데려갈 수 있다"는 말에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부터 내게 결정권을 준 바 없었다. 근데 이제와 아이가 생떼를 부리자 결정권을 나에게 넘기는 상황. 난.. 대체 뭐지.
늘 밥 한 공기를 다 먹는 내가 밥을 절반 이상 남긴 건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게 난 또다시 아침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이젠 한계였다.
남편은 오늘 오후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었다. 근데 그럴 기분도, 몸 상태도 아니었다. 톡으로 식사는 어려울 것 같으니 취소하라고 했고, 톡을 읽은 남편은 시부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간 김에 약을 사와 건넸다.
타이레놀 두 알을 몰래 꿀꺽 삼켰다. 서러움도 꿀꺽 삼켰다. 얼마 안 남은 시간, 그냥 좋게 좋게 정리하고 시부모를 보내드리자고 다짐했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놀아주신 시부가 돌아오자 "과일 좀 내오라"는 말씀도 잘 따랐다.
그렇게 시부모는 떠났다. 침대에 몸을 뉘이니 남편이 아이 둘을 챙겨 서점으로 향했다. 잠깐이라도 쉬라는 것이었다. 난 30분쯤 선잠을 자고 깨 남편에게 톡을 했다. 점심은 먹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남편은 날 선 답 톡을 보내왔다. 기분 나쁜 거 어제부터 다 티 내고, 명절에 이래야 하냐고. 자긴 뭐 쉬었냐고. 아픈 거 왜 얘기 안했냐고. ㅎㅎㅎ 서러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냥 나쁜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고생했다고,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주기에도 부족한 며느리였던 것이지.
처음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받아들인 걸 후회했다.
그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바로 7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혼자 점심에 라면 끓여 먹으며 펑펑 울었다.
뭐가 그리 난 서러웠던가.
우리 친정은 남녀가 평등하게 자라왔다. 3살 어린 남동생은 늘 친정에 오면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난 시누가 와도 늘 함께 상을 차리고, 다 먹은 밥상을 함께 치운다. 아빠는 늘 고기를 굽는다. 그런 집이 정상인 줄 알고 살아온 나에게, 지금의 이 상황은 참으로 가혹하다.
일 년에 많아야 한두 번. 시부모가 상경하시는 것조차 못 견디는 건 내가 이기적이고 못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