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당벌레 May 20. 2024

Round 8. 찢긴 샌드백

희곡 『리어 왕』

날밤이 샌드백이 찢기고 패여 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제일 먼저 사준 아이템이었다. 2~3년 지나니 깊고 날카로운 흔적이 군데군데 생겼다. 성날 때 패라고 사준 것이긴 했다. 그래도 가끔은 내가 찢긴 듯 마음이 무거웠다.


중학생 '필수템'이라는 사명감으로 사줬던 샌드백이었다. 왜 그리 여겼냐 물으신다면 잘 모르겠다. 날밤이는 화난 감정을 상대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못 됐다. 나름대로 배려라 여겼는지 아니면 쌓다가 터뜨리는 아빠 성격 영향이었는지, 아무튼 그랬다. 그런 느낌 언저리에 붙들린 채 소명이기라도 한 듯 서둘러 사줘야 했다. 흠, 소명감의 샌드백이라니.


어릴 때는 잠들기 전에 베개치기도 자주 했다. 베개를 던져주고 야구 배트로 실컷 치거나 킥하게 했다. 적당한 타격감에 녀석이 즐거워하기도 했거니와 부족한 활동량을 채워 잠들게 할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은 쌓인 건 꼭 풀고 재워야 한다는 강박이 한몫했던 것 같다. ‘강박’ 튀어나왔다. 소명보다 한술 더 뜬다.


배가 산으로 갈 듯하다. 재미난 옛날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옛날 영국에 분노조절이 어려운 왕이 한 명 살았다. 가족 잔혹사 속 주인공 되시겠다. 셰익스피어 희곡 『리어 왕』 속 킹 리어다. 청진기 대보니 간헐적 폭발성 장애 진단 나온다.



『리어 왕』 - 리어 vs 코딜리아


리어 왕의 막내 공주 코딜리아는 난감하다. 아버지에게 올릴 말이 마땅찮다.


막대한 권력의 잉글랜드 왕 리어는 늙었다. 만백성에게 밝힌다. 3등분한 영지와 통치권을 세 딸에게 나눠주겠노라고. 왕의 칭호만 누리면서 호위 기사 100명과 함께 세 딸의 영지를 돌아다니며 근심 걱정 없이 여생을 보낼 작정이라고. 그러면서 딸들에게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게 한다.


첫째 딸은 지위, 자유, 은총, 명예처럼 의미 깊은 것보다도 리어를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둘째 딸은 어떤 감각적 기쁨보다 아버지의 고귀한 사랑 속에서만 행복하다고 한다. 흐뭇해진 리어. 왕국의 3분의 1씩 넘겨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막내딸 코딜리아의 답변 차례. ‘뭐라 답해야 할까? 내 사랑은 입보다 무거운데….’



리어  :  (…) 자, 작은 막내야, 내 사랑아. (…) 언니들 땅보다 비옥한 나머지 3분의 1을 위해 내게 뭐라 하겠니? 말해 보렴.

코딜리아  :  말할 게 없습니다(Nothing), 폐하.

리어  :  없다고?

코딜리아  :  없습니다.

리어  :  없음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거라.

코딜리아  :  불행히도 제 마음을 말로 잘 길어 올리지 못합니다. 제 도리에 따라 폐하를 사랑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리어  :  뭐가 어떻다고 코딜리아? 행운을 망치고 싶지 않거든 다시 잘 말해 보거라.

코딜리아  :  폐하, 폐하께서는 저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에 합당한 저의 본분을 - 복종하고 사랑하며 가장 큰 존경을 바치나이다. 언니들은 아버님만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남편들은 왜 맞이한 건가요? 아마 제가 결혼을 한다면 저와 서약을 맺는 남편이 제 사랑과 근심과 의무의 절반을 가져갈 것입니다. 아버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면 절대 언니들이 한 것 같은 결혼은 할 수 없습니다. (…)

리어  :  이리 어린 것이 그리도 매정하냐?

코딜리아  :  어리지만 폐하, 진실하옵니다.

리어  :  좋다, 그러면 너의 진실이 네 지참금이다. (…) 맹세코 이 자리에서 네 아비로서의 모든 보살핌은 물론 너와의 근친 혈연관계를 부인하고, 너를 영원히 나와 내 마음을 떠난 이방인으로 대할 테니까 말이다. 스키타이 야만인이나 배고픔 때문에 제 자식을 잡아먹는 놈이라 할지라도 한때 내 딸이었던 너보다 더 가깝게 내 동정과 구원을 얻으리라.



코딜리아는 땅 한  없이 내쫒기듯 프랑스 왕에게 시집간다. 하지만 리어도 첫째와 둘째 내외에게 모질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광대와 시종 한 명만 딸린 채 헐벗은 광야를 떠돌게 된다. 백발의 왕은 천둥·번개와 비바람을 헤매는 미치광이가 돼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저주와 분노의 대사를 울부짖는다. 요즘이라면 야밤 고성방가로 파출소 신세를 질 만했다. 뒤늦게 코딜리아의 사랑만이 진실했다고 깨닫지만 수치스러운 자책감에 갇혀 있을 뿐이다. 기어이 모두 살해되거나 자살하고서야 혹독한 가족 잔혹사는 끝난다.


“없습니다.” 코딜리아가 결벽증인지 ‘갑분싸’인지는 글쎄다. 스스로 남김없이 진실이어야 진실인지는 어려운지라. 눈길을 잡는 건 리어의 얼핏 가당찮은 반응이다. ‘자식 잡아먹는 상 식인종보다 못한 X’. 분노조절 장애 자가진단 10개 문항 중 9개는 가뿐할 답변이다.


화날 수 있다. 입맛을 맞춰주는 이 아니면 적뿐이었던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자. 그간의 위업과 노고를 칭송받고 싶은 자리였고 숭고한 효성의 성찬식장이었으며 아름다운 권력 이양을 연출하는 공식 석상 아니었던가. 분노 감정 자체야 죄가 있을까. 어떻게 소화하는지, 어떻게 드러내는지가 늘 문제였다.



친절한 앵그리버드


아빠는 화를 적절히 표현하는 데 여전히 미숙하고 불편한 사람이었다. 날밤이 샌드백과 배게치기에 얽힌 강박은 그런 염려 탓이었지 싶다. 분노 조절법을 몸소 보여주지 못해 샌드백에게 떠넘기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주 화내지만 심하게 화내지 않는 지인이 있다. 할머니로부터 화를 참지 말고 이야기하라는 말을 들으며 컸단다. ‘나 지금 화났으니 건드리지 마라’고 자주 표현한다고 한다.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심한 화를 냈으면 꼭 이야기를 나눠 관계를 푼다고도 한다. 화를 전달하는 몇 가지 단계를 지닌 듯하다.


아빠는 화를 삭이는 게 미덕인 듯 자랐다.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했다. 알아듣게 전하는 중간 단계를 익히지 않았다. 폭발적 분노는  이해받지 못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분노는 억울함의 3단 고음이었다. 엄연한 감정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억울함, 반성보다는 거부감과 반감으로 되돌아오는 억울함, 그리고 부정적 결과에 책임까지 져야 하는 억울함이었다. 삭인 시간마저 무시됐다.


아들이 듣는 앞에서 욕설도 어지간히 해댔다. 간접적으로나마 감정적 학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성장한 자녀는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 드러내고자 어른의 욕을 따라하고 업그레이드하기 마련이었다. 욕은 복잡하게 꼬인 분노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제대로 표현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고백일 때도 많았다. 상대와 연결될 기회를 상실했다. 


분노를 표현할 줄 모른다는 건 얼핏 두 가지 같다. 우선 웬만하면 참는다는 거다. 자주 화를 드러내라고들 충고한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방식으로 화를 낸다는 뜻도 있다. 정제된 방식을 익히라고들 한다. 둘 중 어느 게 더 힘든 요구일까. 한참 뒤에야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억눌린 감정은 단번에 정제되지 않으니 자주 드러내서 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찾아보니 분노 조절법도 다양했다. 그 방법들 속에서 너그러움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너그럽다는 건 마음의 폭이라기보다 기울기의 정도 같았다. 천천히 완만하게 흘려보내기. 상대에게든 나에게든.


인간만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고 조절할 수 있다. 리어는 덧붙인다. 그렇긴 해도 나이만 먹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더라고. 힘이 셀수록 더 어렵더라고. 분노의 말과 글은 늘 다시 배워야 겨우 전달되더라고.


친절하게 화내야 했다말이야 막걸리야 싶어도 도리 없었다. 자기 감정 표현의 사후 책임자는 별수 없이 자기인 탓이다. 뭣보다 누군가에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리어 앵그리버드 가라사대, 그대로 배울지니 알아먹게 표현하는 자가 친절하게 표현하는 자녀라는 호사를 누리리라. 연습하기 싫은 연인들이여, 폭풍우의 광야를 울부짖으리라.




어쨌거나 날밤이 샌드백의 찢긴 자국은 계속 늘었다말 못 할 화가 늘었다는 건 제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이긴 하다. 하지만 감정의 벽도 따라서 높아진 느낌이었다. 저 자국 중 부모 때문인 것도 꽤 많을 텐데…. 가끔 마음을 들여다볼라치면 “그냥”이라는 사춘기 전매 특허 단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 와중에 집안에 ‘뽀개진 문짝’이 없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격한 감정은 부모 울타리 안에서 가장 건강하게 표출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지만, 애증이 뒤죽박죽 얽힌 가족의 분노 표현이란 게 참 그렇다. 멀리서 본 가족은 희극이어야 하기 때문이거나 그만큼 고난도 소통인 탓이다. 특히 사춘기 자녀가 편안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스킬은 궁극의 경지 아닐까.


잘 표현해야 전달되고전달할 줄 알아야 알려줄 줄도 알지 싶다. 자녀의 분노 표현 앞에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으려면 부모의 감정을 깊숙이 돌아보고 찬찬히 흘리는 연습이 첫 단계 같다. 날밤이를 샌드백에게 떠넘긴 게 좋았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분노의 언어를 다시 익히는 게 더 필요했다는 것만 확실한 듯하다. ■



===================

#분노조절 #감정 표현 #사춘기

인용 대사 출처 : W. 셰익스피어, 『리어 왕(King Lear)』, 1605~1606, 영국. 1막 1장. 발췌 번역 인용.


이전 09화 Round 7.  두 얼굴의 믿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