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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May 27. 2024

Round 11. 공포의 훈련소

영화 「캡틴 판타스틱」


겨울밤이 깊으면 신병교육대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린 훈련병을 향한 집단 구타가 어둠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훈련병을 둘러싸고 뺨을 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중대장, 선임하사, 당직 사병을 포함한 신교대 조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조직 폭력배 출신 훈련병 동기들이었다.


과거 지역 출신 방위병이 주축인 사단에는 동네 청년 집단의 비중이 높았다. 향토 부대의 작은 훈련소에는 드물게 조직 폭력배가 무리 지어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문신 때문에 방위병 판정을 받고 같은 기수로 입소해 패거리의 위세를 계속 누리려는 것이었다. 유난히 그들이 뭉쳐 들어온, 그 겨울의 군번이 딱 내 군번이었다.


격리된 훈련소는 그들의 일그러진 천국이었다. 입에 걸레를 문 ‘형님·동생’들은 훈련병 위에 군림했다. 몰래 반입한 흉기를 조교에게 들이밀며 화생방 훈련을 거부했다. 나도 세면 도중 이유없이 맞았으며 화장실로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뛰쳐나왔다. 쉬쉬 만능주의 신교대는 모른 척했다. 공중부양도 해낼 것처럼 던 조교들과 합계 6단 무술인이라며 샌드백을 뻥뻥 차대던 중대장은 이 시한폭탄 군번의 퇴소날짜만 기다릴 뿐이었다.


퇴소 며칠 전 기어이 터졌다. 군 경찰대가 들이닥쳤고 폭행 적극 가담자 20여 명이 군 형무소로 끌려갔다. 중대장과 선임하사는 목이 날아갔는데 사단장이 책임을 졌는지는 기억 안 난다. 30년도 지난 얘기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뉴스 한 줄 안 나갔으니 없던 일이다.




날밤이는 강원도 최전방에서 복무 중이다. 입대를 두고 우리 부자는 좀 맞섰다. 고3 이후로 녀석의 삶에 일절 끼어들지 않았지만, 적극적 부모 노릇 딱 한 가지만은 마저 하려 했다. 훈련병 사망과 안전사고, 그리고 해병대 상병의 사망 같은 이슈는 죽 있었다. 다행히 전공과 학벌 여건이 되니 충분히 알아봐서 안전하고 상처받지 않는 군 복무를 했으면 했다.


이공계 대체복무가 마뜩찮으면 공군이나 해군의 기술 모집병이 어떠냐고 몇 차례 권했다. 만만한 기술 자격증도 하나 마련해두라 했다. 웬걸. 어느 날 그냥 최전방의 육군 신병교육대로 징집되겠단다. ‘요새 일반 군대도 좋아졌대’와 복학 일정에 맞더라는 게 이유였다. 입영 예정일은 12월 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혹한기 신교대 3박 4일 맛보기 캠프 어디 없나 싶었다. 입영 연기신청 마감일 전날 끝내 녀석에게 전화했다. 모집병 말고 일반 징집병이라도 상관 안 할 테니 날씨만이라도 풀릴 때 가라고…. 하여튼 파이팅 하나는 리스펙트한 녀석이었다. 가도 가도 설산이었던 신교대에 녀석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옆지기는 “내가 어쩌자고 아들을 낳아서는…” 했다.


녀석은 결국 철책 두른 산악을 헤매는 병사로 배치됐다. 괜찮다. 군 생활 제대로 하겠네. 그렇게 말해줬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의연하지 못한 아빠의 마지막 ‘의욕적 개입’은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대부분 자기 신념을 기반으로 부모 노릇을 계획한다. 통념이 옳다는 신념을 지녔으면 현실적 관행을 따를 테고, 아니라면 좀 벗어난 역할 플랜을 짜기도 한다. 어느 쪽이 됐든 부모 역할을 지탱하는 신념은 대부분 자기 기억과 결핍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자녀들 삶의 방식에 깊숙이 개입한 아빠와 엄마가 나오는 영화를 볼까 한다. ‘옆집 엄마’와는 어마어마하게 딴판인 신념을 지닌 채 의욕적으로 개입한 부모 사례다. 미국판 정글의 김병만이라 할 만한 「캡틴 판타스틱」의 벤 부부다.



「캡틴 판타스틱」 - 벤 vs 자녀들


여섯 자녀들은 학교에 안 다닌다. 아빠 벤(비고 모텐슨)도 회사에 안 다닌다. 세상에서 멀어진 산속의 반문명적 레지스탕스 가족이다. 벤 부부가 리더이자 스승이다. 그들은 ‘쇼핑 사회’를 거부하고 자급자족한다. 숲과 가족, 그리고 아나키스트 가족공동체를 추구하는 히피적 세계관이 세상의 전부다.


맏아들은 명문대란 명문대는 죄다 합격한 능력자다. 동생들도 엄친아다. 명확하게 표현하고 분석하며 설명하고 주장할 줄 알며, 6개 언어 능통자에 수학, 물리학, 철학은 물론 대자연의 법칙에도 밝다. 사회적 상호관계나 대중 엔터테이닝에 쏟을 에너지를 고스란히 심신과 지식을 단련하는 데 사용한 덕분이다. 아이들은 흔쾌히 부모의 문명 저항적 신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엄마 레일리가 손목을 그었다. 레일리는 애초 위선적 세상과 제도를 향한 불신, 그리고 현대 소비사회의 모든 부조리로 상처 입은 영혼이었다. 10년 전 ‘세상으로부터 자녀를 구하고자’ 변호사를 그만두고 소울메이트인 벤과 함께 숲으로 들어온 가족의 리더였다. 하지만 신경쇠약 치료를 받아오다 결국 병원에서 자살한 것이었다.


자녀들은 세상 모두가 'Yes'하려는 교회식 장례를 ‘No!’ 하려고 한다. 엄마의 유언 때문이다. 시신을 화장한 뒤 삶과 죽음의 순환을 축하하는 가무로 장례식을 채워달라는 것이었다. 벤의 장인 장모는 ‘나무 공화국’ 실험 탓에 딸의 치료가 미진했다고 여기는 분들이다. 장례식에 사위가 출몰하면 숨도 쉬지 않고 신고할 것이며 외손주 양육권을 가져와 ‘정상인’으로 키우려 벼르고 있다. ‘부부의 꿈과 자녀의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될 위험 탓에 벤은 장례식 참석을 망설인다.


숲속에서 엄마의 미소가 가장 다정하고 싱그러웠음을 자녀들은 기억한다. 슬픔을 딛고 당당하게 장례식을 막으러 가자고 아빠를 설득한다.


“권위에 저항하라!” 단단한 구호 삼창을 외치며 처가에 들른 벤 가족. 하지만 벤은 10년 넘게 눈도 꿈쩍 안 했던  자기의 양육 철학을 결국 포기하는 결심을 한다. 신념을 고수하려다 딸이 심각한 사고를 당할 뻔하면서다. 예전에 산속 암벽타기 때도 아들의 위험한 사고가 있었다. 벤은 깊은 고민 끝에 장인에게 자녀를 맡기고 떠나려 한다.



다섯째 자녀  :  난 여기 남지 않을 거에요.

셋째  :  이 집은 부의 천박한 과시에요!

둘째  :  공간도 비윤리적으로 사용하고요.

  :  하지만 여기가 너희에게 안전해.

셋째  :  우린 모두 아빠랑 살길 원해.

  :  얘야, 난 널 죽일 뻔했어.

셋째  :  그건 사고였어요. 그냥 타일이 깨진 것뿐이었어요.

  :  (긴 침묵) 아름다운… 실책이었어. 내 실책이야…. 엄마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어. 알다시피 거기 있으면 증세가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근데 과했어. 벅찼어. 나도 알고 있었다. 정말이야. 알고 있었어.

다섯째  :  왜 다 함께 머물면 안 되는 거에요?

  :  그러면 내가 너희 삶을 망칠 테니까.



좁고 어려운 신념을 실천한 벤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소울메이트는 끝내 자살했고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아이들은 다쳤고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미숙했다. 신념의 톱니와 부모의 톱니는 완전히 맞물리지 못했다.


이 낭만적 영화 말미에는 혼란스러운 반전이 있다. 자녀들은 다 같이 외가를 ‘엑소더스’한다. 벤과 함께 엄마의 관을 도굴해 유언대로 화장한다. 생전의 애창곡을 합창하며 삶과 죽음의 아름다운 순환을 축복하는 의식을 치른다. 남의 시선에 이상해 보이지만 벤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고 믿는다. 그 힘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려 한다.




벤 부부의 양육법은 얼핏 유별나 보인다. 교육 커리큘럼과 양육 장소의 유별남으로부터 잠시 눈을 떼 보자. 그러면 벤의 부모 노릇 선생님 노릇이 일상적 부모나 선생님의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만도 않다 여길지 모른다.


모닥불 옆에서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는 벤 가족의 학습법은 프랑스 바칼로레아 학습 커리큘럼이나 유대인 하브루타 교육법과 닮았다. 태권도 학원에 가듯 숲속에서 무술을 배운다. 암벽을 끝까지 올라야 하는 문제 해결법은 부족한 과목에 대한 자기주도학습법과 닮았다. 사슴을 사냥한 아들에게 성인식을 치러주는 벤은 첫 월급을 칭찬하는 부모와 다르지 않았다. 숲속의 명상은 한강 둔치의 아침 요가 같았고, 공중도덕을 가르치듯 가족공동체 윤리를 가르쳤다. 그리 보면 50년 뒤 전면 제도화할 ‘장기 기숙형 숲스쿨링 교육과정’일 수도 있다.


육아에 정답은 없다는 말처럼 ‘현실’로 여기는 일반적 관행도 실은 명확하지만은 않다. 영어 교육을 언제 시작할지조차 아빠 다르고 엄마 다르며 옆집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교육 당국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벤의 커리큘럼 역시 떠올릴 수 있는 변용이다. 벤은 양육 커리큘럼이 유별난 부모라기보다 거기 깔린 양육 철학이 비교적 덜 흔들렸던 부모일 뿐일지도 모른다.


양육 철학, 그러니까 부모의 관점과 신념을 자녀에게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벤 역시 주류 학부모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세상으로부터 자녀를 구하고자 대안적 공동체라는 신념으로 자녀의 삶에 적극 개입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어긋난 톱니에 혼란스러워했다. 스케일은 턱없이 다르지만 나 역시 기억과 경험에 얽매여 날밤이의 입대 전략을 구상했다가 속상하고 혼란스러워하고 포기하고 마는 어쩔 수 없는 부모였다.



판타스틱한 부모


지속적 학교폭력이 무서운 건 내가 나인 걸 혐오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날밤이를 보내고 잠을 설친 날 불안함도 불안함이었지만 내 기억 속 분노와 두려움도 덩달아 되살아났다. ‘그 많은 방법 놔두고 왜 내 아들만?’ 같은 억울함마저 일었다. 자녀 인생길에 대한 내 관점이 부정당하는 기분도 없지 않았다.


‘쉬운 길’이라는 이름 아래 부모 기억의 틀에 맞추려다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는 게 양육일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이니 좀 의연해진다. 빈곤하게 자란 이에게는 부유한 삶이 정답이겠지. 확고한 정답을 지닌 벤 같은 이가 또한 자녀의 안전사고 앞에서는 ‘이 산이 아닌가 봐’ 할 수밖에 없었지. 나이가 들어도 제 관점을 이식할 수밖에 없고 또 좌절하며 그렇게 바꿔 가는 거였지.


날밤이식 군 생활도 나름 배울 게 많겠지. 고생 좀 해보고 나면 갈등 상황에서 관점 간의 협상과 조정, 그리고 설득도 중요하다는 걸 느끼겠지. 잘 모를 때 어른 말 듣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배울 기회도 되겠지.


‘하필 나한테만 그런 불운이?’ 같은 억울함도, ‘나라고 그런 일 생기지 말란 법 있나’, ‘어째서 내 가족에게만 일어나면 안 된단 말인가’ 하는 마음으로 바뀌기도 하겠지. 남의 밥그릇 기웃거리다가 청춘 낭비되는 불행이 아니라 학사 일정에 맞춰 후다닥 다녀오는 행운일 수도 있겠지. 이웃의 그릇이란 부족하지 않나 살펴볼 때만 들여다보는 것이니.


직장인은 자유로움을 찾지만 퇴사하면 직장의 안정감을 찾는다. 틀에 갇힌 듯해도 나름대로 틀 밖이며 틀 밖을 찾은 듯해도 결국 틀 안인 게 또한 삶이다. ‘틀로부터 자유로운’이라는 건 판타지다. 양육의 모든 순간은 기억과 결핍으로 빚어진 부모의 틀이 개입하려는 순간임을 늘 잊지 않으면 된다. 자녀의 틀은 부모의 틀과 다르다. 판타스틱양육이란 그 과정을 견디며 수정해가는 끝없는 여정인 듯하다. 


누군가를 이상하게 여기는 순간은 그 역시 나를 그렇게 여기는 순간임도 망각하지 말아야겠다. 한겨울에 그냥 육군 징집병이 되겠다는 날밤이에게 ‘아주 아름답게 미쳤구나’라 해버리지 않은 건 그나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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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대사 출처 : 영화 「캡틴 판타스틱(Captain Fantastic)」, 일렉트릭시티 엔터테인먼트, 2016. (각본·감독 맷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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