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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Oct 13. 2024

Round 11. 폭풍의 언덕을 지나는 법

소설 『폭풍의 언덕』

갓 태어난 심장은 마당의 양귀비 씨앗보다 작다고 한다. 그 작은 세포 덩이를 심장이라 이름 하는 까닭은 그게 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눈 오는 금요일에 0살 태아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다. ‘니 내 누군지 아니?’라던 장이수(영화 「범죄도시」)의 외침 같았다. 아빠라는 이름도 그때는 0살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아빠의 사랑도 태어나고 자랐으며 덧칠되고 명찰이 바뀌었다.


갓 태어난 사랑은 몰두하는 에너지였다. 마음과 노력과 시선과 시간을 격정적으로 쏟는 몰입. 뭔가를 자기보다 더 자기로 대하는 정신의 고도긴장성. 세상이 허락하는 유일한 막무가내 짓.


부모와 자녀를 휘감는 이 에너지가 처음엔 서로 고스란히 스며들 수도 있었다. 어느덧 튕겨 나오거나 가로막힐 때도 생겼다. 몰라서 튕겨내거나 절실하게 튕겨내기도 했으며 튕기지 않으려다 튕긴 게 되기도 했다. 가로막힌 에너지는 고였다. 그러다 이름을 바꾼 채 휘몰아쳐 나오기도 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속 사랑들이 그랬다. 몰두하는 에너지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튕겨나고 가로막혀 미아가 돼버린 이 막무가내 에너지가 어떤 얼굴들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작품이었다.



『폭풍의 언덕』 - 캐서린 vs 히스클리프     


영문학 3대 비극 가운데 하나다. 세 작품 중 연인의 사랑을 다룬 유일한 작품인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절한 서사도 오르지 못한 시상대에 올라 있다.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미치지 않은 게 미스터리’라는 평도 받았다. 지독한 사랑과 가혹한 복수 이야기다.


캐서린  :  넬리, 내가 곧 히스클리프야. 그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늘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히스클리프는 그냥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런 일은 벌어졌다. 캐서린에게 마음을 품은 이가 생겼다. 사회적 지위와 부, 게다가 품격까지 갖춘 ‘티티새 지나는 농원’ 저택의 에드거였다. 반면 캐서린과 폭풍의 영혼을 깊이 나눈 연인 히스클리프는 고아였다. 캐서린의 부친이 생전에 ‘주워와 키운’ 거칠고 까만 피부의 멸시 받는 청년이었다. 캐서린은 에드거와 자기의 영혼은 서리와 불처럼 섞일 수 없다 여겼지만 히스클리프가 아닌 에드거와 결혼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히스라는 덤불 식물이 무성한 높은 언덕 위의 집 ‘폭풍의 언덕’에서 함께 자랐다. 캐서린에게 가장 큰 고통은 히스클리프가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으로부터 받는 멸시였다. 그녀는 히스클리프가 존중받는 삶을 살게 지원하고 싶다며 에드거의 부와 지위를 얻겠다고 했다. 히스클리프는 한마디도 않고 히스 언덕의 캐서린을 떠났다. 히스클리프를 잃고 오래 앓은 캐서린은 결국 에드거에게 갔다.


히스클리프는 3년 후 부유한 신사가 돼 돌아온다. 그와 에드거는 노골적으로 서로를 모욕하며 넘지 못할 강을 건넌다. 에드거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만나는 것을 금지해 버린다. 또다시 히스클리프를 잃은 캐서린은 쓰러지고 결국 깊은 병을 앓는다. 캐서린이 죽기 전날 밤 히스클리프가 몰래 찾아오고, 그녀는 바짝 마른 몸과 창백한 피부와 핏기 없는 입술로 자신의 사랑과 희생의 에너지를 연민한다.


캐서린  :  너랑 에드거가 내 가슴을 찢어놨잖아, 히스클리프! 그래 놓고 둘 다 나를 찾아와서 마치 자기네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듯 비통해하잖아! 난 널 가엽게 여기지 않을 거야. 조금도 불쌍하지 않아. 네가 나를 죽였잖아. 그러고는 아주 잘 지내는 것 같구나.


죽음을 앞두고 캐서린은 자기보다 더 자기 자신이었던, 마음속 히스클리프를 영원히 상실했다고 느낀다. 히스클리프에게 몰두했던 캐서린의 에너지는 그렇게 자기연민의 상실감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히스클리프  :  니가 내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얼마나 가혹한 거짓말을 했는지 알려주는 거니? 왜 나를 모욕했니? 왜 자신의 마음을 배신한 거냐고, 캐시? (…) 네가 사랑한 건 나였잖니.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린 거야? (…) 니가 니 손으로 우리를 갈라놨어. 내가 니 가슴을 찢은 게 아냐. 니가 그랬어. 니 가슴을 찢으면서 내 가슴까지 찢어놨어. 내 목숨이 질긴 만큼 내 괴로움도 질길 거야. 내가 살고 싶겠니? 내가 어떻게 살겠니? 니가, 맙소사! 네 영혼이 무덤에 묻혔는데 너라면 살고 싶겠니?

캐서린  :  날 그냥 둬.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고. (…) 내가 잘못했다 해도 이렇게 죽어가잖아. 그거면 됐잖아! 너도 나를 떠났지만 나는 널 탓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널 용서한다고. 너도 날 용서해!

히스클리프  :  용서하기가 힘들어. 이 꼴이 된 네 눈을 들여다보기도, 이 꼴이 된 네 손을 느끼기도 힘들어. (…) 다시 키스해 줘. 네 눈을 바라보지 못하게!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용서할게. 날 죽인 너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너를 죽인 사람! 그들을 어떻게 (용서하겠니)?(I love my murderer – but yours! How can I?)


캐서린은 죽고 히스클리프의 지독한 복수가 휘몰아친다. 자기를 멸시하며 캐서린을 향한 에너지를 영원히 가로막은 두 집안을 향해서다.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에 몇 십 년 동안 파괴적 광풍이 이어진다. 두 집안의 주인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자녀세대에게까지 복수는 계속된다. 전 재산과 상속권마저 빼앗는다.


사랑하는 감정을 유도하고 다시 그 감정을 튕기게 하거나 가로막는 복수 방법이 자행된다. 히스클리프가 당한 적 있던 고통이다. 그 모든 고통을 선사하는 이가 자신이라는 것도 명확히 알려준다. 히스클리프의 몰두 에너지는 끔찍한 증오를 잉태했다.


오랜 복수의 광풍이 극에 달한 뒤, 히스클리프의 에너지가 이번에는 우울한 우수의 이름으로 바뀌며 흐려졌다. 하녀 넬리에게 말한다.


히스클리프  :  한심한 결말이야, 안 그래? (…) 내가 죽기 살기로 덤볐던 일들이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잖아. (…) 막상 준비가 다 끝나고 완전히 무너뜨릴 힘이 생겼는데, 이제 두 가문 중 어느 집 지붕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낼 의욕조차 사라져버렸어! 옛 원수들은 나를 이기지 못했고 드디어 그 후손들한테 복수할 순간이 눈앞에 있는데 말이야. (…) 이제 그들을 파멸시키는 것에서 기쁨을 잃어 버렸어. 기쁘지도 않은 일을 하기엔 난 너무 게을러졌어.


음울한 우수의 잔해에 서서 히스클리프가 무너뜨릴 것은 자신밖에 안 남는다. 비바람 몰아치는 캐서린의 묘지를 매일 맨몸으로 헤매고 밤새 캐서린 방 창문을 활짝 열어 그녀의 영혼이 찾아들기를 바란다. 식사도 끊은 히스클리프는 아침에 죽는다.



주고받으며 살아남기     


사랑의 언덕은 오르자고 오르는 게 아니었다. 폭풍에 밀려 오르는 데였다. 처음 오른 그곳은 격정과 정열과 욕망과 낭만의 원초적 에너지가 몰아치는 중이었다. 삶이 살아 있게 하는 원초적 건강성이었다. 하지만 범벅돼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증오하는 이를 대할 때 활성화하는 뇌 부위는 같다고 한다. 사랑이 원초적 몰두 에너지이기만 하다면 증오 또한 파괴에 몰두하는 사랑이라 한 들 할 말 없다는 말 같다.


원초적 건강성은 성장해야 했다. 승화되지 못한 원초성의 뒤끝은 꼴사납게 반죽되기 십상이었다. 자기연민의 비애로 변하거나 우울한 체념을 남기거나 피해의식의 뒤틀린 미움을 잉태하기까지 했다. 상대에게는 무엇으로 남을까. 나와 너를 파괴하고 자존과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특히 가족 간 몰두 에너지에는 오랜 애증이 뒤섞였기에 바로 바라보거나 승화하기 더 어려웠다.


주고받으면서 고쳐가는 게 사랑의 상호작용이었다. 궁합이야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었다. 꺾이며 정제해 가고 책임지면서 새로운 가치로 바꾸는 여정이 지속 가능한 사랑의 상호 성장이었다. 자녀가 1살이면 부모의 사랑도 1살일 뿐이었다. 부모의 사랑도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거쳐야 했다. 부모를 향한 자녀의 감정도 그랬다.


감정 에너지를 때로는 아기처럼 때로는 사춘기처럼 여겨야 한다는 걸 배웠다. 쏟아내는 걸 멈추고 한발 떨어져 본 다음 고이 돌아보지 않으면 부메랑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게 상대를 사랑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인 듯했다.


보여도 쉽지 않았다. 혼자 얻는 치유나 성찰의 유통기한은 짧았다. 스타일은 여전히 맞섰고 말은 기어이 필터 없이 나갔다. 하루만 살 듯 분노를 토했고, 쏟은 에너지의 본전 생각도 불쑥 튀어나왔다. 혼자 산토리니섬으로 떠나지 않는 한 폭풍우는 언제고 몰아쳤다.


찰떡같이 내 마음 같기를 바라는 공감보다 서로 다른 공감 간의 공존과 타협이 더 필요했다.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 돌아온 자기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낼 관용 말이다. 감정의 그런 상호 관용은 손에 잡히는 틀 위에서야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건 부모와 자녀가 관계 맺는 규칙을 돌아보는 일이었으며 협상과 조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소통 방식을 더 또렷이 다듬어야 했다.


내 자리에 나와 맞선 이를 받아들이며 나와 맞선 이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게 나눔이었다.그 나눔의 방식이 규칙이었다. 부모와 자녀도 규칙을 나누며 협상하는 파트너십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뭐든 하면 늘게 돼 있었다. 계속해서 규칙과 소통 방식을 돌아봐야 했던 경험담을 들려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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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관계 다듬기 #규칙 #공존

인용 대사 출처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 영국. 1권 9장, 2권 1장(단권 15장), 2권 19장(단권 33장). 발췌 번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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