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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Oct 20. 2024

Round 13. 어느 슬픔에도 이유가 없지 않으니

영화 「크림슨 타이드」

아들~, 가족이나 일가친척 윗사람을 대할 때 표정이 자주 딱딱해지는 거 혹시 알고 있냐?” 친구와 함께할 때 표정과 하도 달라 물어봤다. 날밤이는 안다고 했다. 심지어 일부러 그럴 때도 있단다. 불편할 때 불편한 표정 짓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불편하냐 물었더니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더라. 밥이나 마저 먹었다.


불편한 이유를 괜히 캐물었다. 불편하지 그걸 말이라고. 기본적으로 일가친척과 공통 관심사가 있을까. 세대 간 가치관과 정서 차이, 규범과 대화법의 충돌, 부담스러운 기대와 요구에서 나오는 불편이 한두 가지일까. 온갖 대립이 널린 시절이다. 말 함부로 했다가 괜한 훈계 받기도 십상 아니던가. 녀석도 나름대로 노력했을 것이다. 잘 안 돼서 속상했을 거고. 불편한 자리의 불편한 표정이 딴은 아들만의 것도 아니고.


어떤 불편한 관계는 캐묻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관계를 개선하려는 적극적 시도가 늘 긍정적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바둑 격언도 있다. 모르면 손 빼라. 현재 상태가 그나마 최선 같아 악화되지 않게만 관리한다. 어쩔 수 없으니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변에 하소연하며 풀기도 한다. 말끔해지지는 못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라운드에서 기존의 가족규칙을 점검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가족 간 감정과 오해의 눈덩이를 녹이자는 시도였다. 만병통치술인 듯 독자들께 약을 팔았지만 당연히 충분하지 못했다. 과거를 세탁했다고 미래마저 뽀송뽀송해지진 않는다. 가족 간 불편한 갈등에 새로 직면할 때마다 소극적으로 회피할지 적극적으로 대응할지 판단하는 건 늘 번거롭고 두려웠다.


희한한 인물 둘을 볼 참이다. 영화 「크림슨 타이드」 속 함장과 부함장의 말다툼이다. 회피해도 뭐랄 사람 하나 없는 버거운 대립 상황이면서 회피할 명분도 찰떡같이 차려진 상황에 처한 두 인물이다. 뚜렷한 원칙을 고집하며 적극적 대립을 마다하지 않은 문제적 인물들이다.



크림슨 타이드- 램지 함장 vs 헌트 부함장


러시아 쿠데타군이 ‘오지마라 했다’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대는 가상 1995년. 러시아 정부가 주변국에 전쟁을 벌이자 서방 세계가 노골적 제재를 가한 때였다. 서방의 제재를 러시아를 향한 선전포고로 간주한 러시아 군부 강경파가 격분에 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극동 지역 핵 ICBM 기지와 잠수함 기지를 장악했다. 서방과 러시아 정부 연합군이 곧바로 진압 작전을 개시하자 쿠데타군이 핵미사일 선제 발사 위협에 나섰던 것.


쿠데타군 핵 기지 근처의 심해. 미군 전략핵잠수함 앨러바마호가 작전 중이다. 작전 12일 째. 사령부로부터 긴급 명령통신문을 수신한다. 매뉴얼대로 인증코드를 확인한다. 확실한 명령문이다. 1) 쿠데타군이 핵미사일 액체 연료 주입 시작. 1시간 내 발사 스탠바이 예상. 2) 앨러바마호 핵미사일 발사 허가. 적 ICBM 기지로 즉시 10기 선제 발사.


곧바로 선제 타격 준비에 들어간다. 이미 고체 연료가 담긴 미사일이라 14분이면 발사준비가 끝나지만, 아뿔싸 준비완료 전에 적 잠수함에 노출! 숨도 안 쉬고 날아오는 어뢰 2발. 하필 그 순간 수신되는 또 다른 명령통신문! 심해의 초음파 통신 속도는 그 와중에 천하태평. 명령문 수신 도중 적 어뢰 근접 폭발! 통신기 손상. “핵미사일 발ㅅ….” 2번째 명령 통신문은 더 이상의 내용도 인증코드도 없이 끊어져 버린다.


가까스로 적에게서 벗어난다. 헌트 부함장(덴젤 워싱턴)이 끊어진 통신문을 받아들고 램지 함장(진 해크먼)에게 돌아온다. 발사키를 목에 건 함장이 통신문을 확인한다. 의미 없네. 내용도 인증코드도 없군.


당시 미해군 핵무기 발사 매뉴얼은 ‘명령문의 유효성에 대해 함장과 부함장 포함 2인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였다. 헌트 부함장, 발사 취소 명령일 수 있습니다. 램지 함장, 발사를 막으려는 적의 속임수 통신이면? 헌트, 그러니 시간이 걸려도 통신을 복구합시다. 확인 후 발사해야 합니다. 램지, 노닥거릴 틈 없다. 스탠바이 즉시 발사한다. 앨러바마호 발사 스탠바이 4분 전.



램지 함장 : 우린 이미 명령을 받았네. 그건 선제 발사 명령이었네.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 쿠데타군 기지의 빈 발사대를 때릴 가능성이 점점 커지게 돼. 적이 먼저 쏠 테니까.

헌트 부함장 : 압니다.

램지 : 자네도 잘 알지만 인증코드 없는 명령문은 명령이라고 할 수 없어.

헌트 : 하지만….

램지 : 그게 우리의 제1 규칙이고, 반복적으로 훈련한 시나리오의 기본이었어. 예외 없는 규칙이네.

헌트 : 함장님, 사령부에서 우리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미사일을 제대로 발사했는지 위성으로 살펴볼 겁니다. 만약 발사되지 않으면 다른 부대에 지시할 겁니다. 한 구역에 늘 예비 전력을 두니까요.

램지 : 예비 전력에 대해선 나도 아네.

헌트 : 제 말은, 함장님! 대체 병력이 있다는 겁니다. 명령 확인 전에 발사하지 않는 게 우리 의무입니다.

램지 : 자네라면 발사 가능한 아군 잠수함이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되지만, 함장인 나는 적 잠수함에게 공격당했을 수 있다고 여겨야만 해. 밤새 입씨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자네 희망을 받아줄 여유가 없어.

헌트 : 함장님!

램지 : 헌트, 우리 규칙은 마음대로 해석돼선 안 돼. 개인적 직감이나 느낌으로, 어깨에 앉은 조그만 천사나 악마의 속삭임으로 해석해서도 안 돼!

헌트 : 함장님!

램지 : 이미 어떤 명령이 내려졌는지 우린 잘 알고 있어. 그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사령부의 그 명령에는 불명확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

헌트 : 함장님!

램지 : 헌트, 난 결정했어. 나는 함장이야. 그러니, 망할, 입 닥쳐! 빌어먹을. (1번 마이크) 64741/2 방위로 핵미사일 발사준비! 여기는 함장이다.

헌트 : 함장님, 동의할 수 없습니다!

램지 : 복명복창해! 아니면 부함장을 교체하겠다!



무려 핵미사일 선제 발사다. 미 해군 최강 병기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의 트라이던트 핵미사일. 1발의 위력이 일본 인구 10만 명을 지운 히로시마 원자탄의 최소 200배다. 그거 10발을 먼저 쏘는 문제다. 인류의 이 자살 도구는 살인하지 않는다. 녹이고 증발시킨다. 적이 선제 발사할지 모른다. 1시간도 안 남았고 적 잠수함은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기동과 교신과 뉴스에 어두운 심해. 매뉴얼대로 인증된 선제 발사 명령을 이행하는 문제다.


「울프콜」(2020)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자국 잠수함의 핵미사일 발사를 취소하고자 그 잠수함을 격침시킨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핵잠수함에 전달된 발사 명령은 일단 인증되고 나면 취소가 거의 불가능하다. 함장은 이후 수신되는 모든 명령을, 군 통수권자가 인질로 잡혔다고 간주해 무시해야 할 의무와 재량을 지니기 때문이다. 핵은 개발하는 것보다 제때 발사하고 취소하기가 더 어렵다.


현대전의 최초 타격 목표는 기간통신망이다. 선전포고와 동시에 전자기파 폭탄이나 해킹으로 적국 통수권자와 사령부 그리고 발사 현장 간 통신을 마비시킨다. 기간통신망 마비와 더불어 핵보유국 간 전쟁의 최우선 지침은 상대국 통수명령권자 참수 작전과 선제 핵 타격이다.


우발적·즉흥적 핵전쟁 위기도 일상이었던 모양이다. 발사 직전 취소 사례, 발사 후 불발 사례 등은 언론에 알려진 것만 최근 50년 150건이 넘는다. 잘못된 상황판단과 실수, 불순한 의도와 컴퓨터·통신 오류 등이 이유였다. 그 외 탈취됐거나 분실된 핵무기 ‘부러진 화살’의 규모는 끝까지 베일에 감춰질 것이다. 핵무기를 갓 얻은 국가의 발사 및 취소 명령 전달체계도 애초부터 미숙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 무력 정책을 헌법에 정식으로 담았다던가. 우리는 사회적 참사 때마다 재난안전연락망 불통과 스마트폰 SNS 먹통으로 낭패를 겪는다. 핵보유국에 둘러싸인 우리다. 통신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심해의 핵미사일 발사와 취소 문제가 영화 속 설정만은 아닌 것 같다.




램지 함장은 핵무기 운용 과정에서 방아쇠 역할을 대변한다. 뉴스에 얼굴이나 내보려는 쿠데타가 아니었다. 쿠데타군 1명이 죽으면 90만 명분의 핵 테러를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머뭇거리다가는 막으려 해도 못 막는다. 쿠데타군이 먼저 발사하고 나면? 한 발씩 서로 절충하리? 앨러바마호가 격침돼도 마찬가지다. 핵 기지 25군데 모두를 먼저 날려야 한다. 장기간 잠항과 물자 부족 그리고 두려움과 주저함이라는 극한 스트레스를 이기고자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속임수와 해킹, 그리고 항명을 넘어 항상 그리고 반드시 발사하기 위해서였다.


헌트 부함장은 안전장치의 역할을 대변한다. 쿠데타군이 오래 버틸 정세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발사 취소 명령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지시 없이 절대로 발사돼서는 안 된다. 상황이 끝났는데도 10발이나 먼저 발사하고 나면? 사과하리? 핵 테러를 핵으로 막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보복 핵전쟁의 방아쇠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쿠데타군의 스탠바이 시각은 앨러바마호를 눈 멀게 하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다. 통신기 수리만이 몸을 묶을 돛대며 귀를 막을 밀랍이다.


램지와 헌트 모두 같은 신념과 원칙을 따르려 했다. 인간이 Tea-time 만에 개체수 수 백 만을 줄인 최초의 고등생물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 그리고 통수권자의 유효한 명령에 따라 운용한다는 원칙이었다. 헌트가 발사에 동의하지 않자 전 승무원은 두 편으로 갈린다. 상대편을 번갈아 감금한다. 촉박한 시간. 결국 총부리까지 겨눈다.



기적의 3분


깊은 바다에 엎드려 발뺌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교전 중에 통신이 손상된 데다 적 잠수함 눈에 띄는 것도 피해야 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핵전쟁이었다. 통수권자의 지시로 발사한다는 규칙 역시 ‘항상 그리고 반드시’ vs ‘절대로’의 두 측면이 함께 담긴 부족한 규칙 아니었던가. 불가피하게 아무 것도 안 해도 됐던 램지와 헌트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했다. 가치 있는 다툼은 그렇게 시작된다.


변화를 위해 갈등이나 대립이 필요할 때도 많다. 적대적으로 흐를 때가 문제였다. 소극적으로 회피하는 건 관계가 더 나빠질까 두렵거나 상황이 버거운 탓이었다. 서로 맞선 입장 어디에도 이유가 없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답 없는 갈등을 괜스레 드러내다 입을 손해도 문제였으며, 체면이 깎이거나 외부 평판이 나빠지는 것도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갈등을 피할지 적극적으로 해결할지 결정하는 것도 실은 효능감을 저울질하는 일이었다.


어느 쪽 결정이 왜, 얼마나 더 절실한지 판단할 문제였다. 충돌하는 괴로움을 피하고 체면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한 가치일 수도 있다. 자기 삶이 상하는 걸 막아야 하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부모와 자녀 갈등에 맞서는 효능감은 후자에 가까웠다.


장모님이 늘 그러셨다. 그저 사랑으로 키우면 된다고. 그러다 보니 길이 있더라고. 쿠데타군의 핵미사일 발사 예정 시간 직전, 램지와 헌트는 기어이 마지막 3분을 기다리기로 타협한다. 앨러바마호의 통신기가 극적으로 숨 쉰다. ‘반군 항복. 발사 취소’ 명령이 확인됐을 때 양편은 얼싸안고 환호한다. 책임을 발뺌할 수 없었던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유대감이었다.


불가피하지만 가치 있는 갈등도 있었다. 그게 가족 관계라면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서툰 아빠와 아들이 기적의 3분을 발견하진 못하더라도 실수와 회한을 줄일 협상은 할 수 있었다.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걸 잊지 않고, 양쪽 다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각자의 입장을 선의로 여기는 마음을 남긴다면 말이다.


협상은 결론보다 과정이었다. 어느 슬픔에도 이유가 없지 않으니 만남 속의 수많은 지평을 해석하며 업데이트해 가는 실천이었다. 아들도 아빠도 “지금은 말하기 싫은” 불편한 만남 속에서도 협상과 조정의 여지를 놓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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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갈등 #협상과 조정

인용 대사 출처 : 영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할리우드 픽쳐스, 1995. (각본 마이클 쉬퍼, 감독 토니 스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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