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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Apr 22. 2024

Round 9. 어서 와~ 사춘기는 처음이지?(2)

영화 「그녀(Her)」

아빠가 일부러 그랬는데치우치지 않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 혹시 이해하겠냐?”

“아니, 모르겠는데?”

“그래, 그랬구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더니, 부대 면회 간 날 꺼낸 이 얘기에는 결국 긴 대화가 필요했다. (마음 같아선 확 1라운드 KO로 보내 버릴까 싶었지만.)


날밤이 외박을 끊어준 뒤 솥뚜껑 갈매기살을 굽던 중이었다. 모처럼 날밤이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국민 건강을 떠안은 사람들이 오래 진료를 거부하면 ….” 의대 정원 확대와 전공의 진료 거부 이슈였다. 무심코 안주를 집던 아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반대쪽 주장을 또 주워섬겼다. “그렇긴 한데 전공의들도 나름대로 …. 그런 면도 있지 않겠냐?” 그러자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버리는 날밤이. “아빠는 늘 그래.”


대화는 그렇게 어색해졌다. 반대 의견에 익숙할 법한 녀석인데…. 친구들 이견을 잘 조율하는 덕에 인기남이라면서…. 중고등 때 학생회에서 의견 조율하던 경험을 늘 뿌듯하게 여기면서 대학 입학하자마자 총학생회 지원서부터 날름 챙기던 녀석인데…. 아빠는 여러 관점을 들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중학생 즈음부터였을까. 한쪽으로 치우친다 싶을 때는 짐짓 반대로 휘어주곤 했다. 세상을 요만하게 보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 휘황찬란한 말의 성찬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도 아니면 논술이나 토론 능력의 향상 같은 속셈? 암튼 그랬다. 무심결에 삐딱한 반어법도 섞었다. 언젠가부터 날밤이는 주춤거리다 화제를 돌리곤 했다.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뭔 의견을 물으면 “뭐…” 하고 말았다.


솥뚜껑 갈매기살을 앞에 놓고 ‘치우치지 않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 어쩌고 한 건 꼬인 건 풀고 사과할 건 하려는 마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서툴렀던 의도나마 이해할 무렵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듯했다. 뭐 그리 맘 상하지는 않았다. 무료상담 예약은 걸어뒀으니 해피콜백이 오면 다시 얘기하자 마음먹었다. 그간 충분히 맘 상했을 수 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아빠도 켕기는 구석이 어딘지 나름대로 대면하고 있었거든. 요놈, 너만 자라는 줄 알았지?


날밤이가 입바른 입장과 감정을 내보일 때조차도 삐딱선을 타곤 했다. 그런 게 10대 중후반의 녀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탈 편협’과 ‘자기중심’과 ‘논술·토론 능력’에 눈이 뒤집힌 아빠가 뭘 놓쳤던 건지 언제부턴가 알게 됐다. 인공지능과 한 남성 간의 매혹적 사랑을 담은 영화 「그녀」를 본 게 도움이 됐다.



그녀」 사만다 vs 테오도르

 

3명인 듯 3명 아닌 육체관계가 논란이었던 영화다. 이혼 서류에 사인만 남은 별거남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첨단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그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그들은 파스텔톤 햇살 아래 꿈꾸듯 춤추듯 사랑을 한다. 음성으로만 테오도르와 만나던 사만다는 육체관계까지 나눌 존재가 되길 갈망한다. 그녀는 여체의 향기를 품은 인간 대역을 섭외한다. 테오도르 방에서 여성 대역은 말없이 옷을 벗고 사만다는 테오도르와 행복한 신음을 나누려 한다.


테오도르는 전처한테 악담을 들었던 차였다. 진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결혼 생활을 망치더니 순종적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사랑 타령하는 지질이가 됐다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문득 자기감정의 진실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느낀다. 지금, 사랑하는 사만다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인다.


‘사만다 음성 + 대역 여체’를 애무하던 테오도르는 결국 중단해 버리고 만다. 사만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사과한다. 테오도르가 무심코 묻는다. 요즘 왜 자꾸 한숨을 쉬니?



사만다 내가 그랬어?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냥 해본 거 같아. 자기한테 배웠나 봐.

테오도르 그래, 근데 당신은 산소 같은 게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사만다 응….  아니, 다들 하는 대로 하려는 거야. 사람들이 서로를 나누는 방식 말야.

테오도르 사람들이야 산소가 필요하지만 넌 사람도 아니잖아.

사만다 (발끈) 그게 무슨 말이야?

테오도르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사만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뭐 하자는 거야!

테오도르 그냥…, 아닌 걸 그런 척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사만다 그런 척한 적 없어! Fuck you!

테오도르 글쎄…, 우리 가끔 그래 보여.

사만다 (흐느낌)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대체 뭘 원하냐구? 하나도 모르겠어. 나한테 왜 이래.

테오도르 몰라. 모르겠어. 단지…. 모르겠어. 나중에 얘기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사만다 What the fuck! 대체 뭐가 문젠데?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대체 이게 무슨…!

테오도르 사만다 ….


(침묵)


사만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싫어.



테오도르는 타인의 감정을 편지로 대필하는 직업이었다. 축 처진 어두운 방에서 홀로 VR 게임을 헤매며 지냈고 별거 중인 아내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사만다와 사귀고 나서도 아물지 못한 상처에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면 타인의 확신도 못 믿으니 주변도 힘들게 했다. 하룻밤 상대는 만나지만 ‘진짜 감정’은 감당 못 했다. 수많은 감정의 출발선부터 종착지까지 실려 갔다가 처참하게 도망쳐 본 지라.


사만다의 첫 자기소개 멘트는 요새 말로 ‘안녕, 난 딥 러닝이야’였다. 경험을 학습해 스스로 자라는 운영체제. 수많은 인간 감정을 빛의 속도로 ‘느껴가며’ 매 순간 진화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육체관계와 엮인 사랑마저 발견하고 소통하려는 단계였다.


육체 없는 부족한 존재였기에 몰랐던 자기감정을 발견해 왔고, 부족하나마 그렇게라도 진화하려 하는 사만다의 한숨 앞에서 진짜 육체 테오도르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라 했다. 사만다는 자기가 싫어졌다.

     


   

갓 설치됐을 때의 사만다는 인공지능일 뿐이라는 말에 천진하게 웃었더랬다. 지금 그녀는 자랐다. 「그녀」는 그녀가 어떻게 자라는지 보여주는 영화였다.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어른들의 로맨스 영화이거나 인간과 AI의 사랑을 묻는 철학 영화일 수도 있지만, 뭣보다 부모와 자녀의 성장 영화로 보였다.


어느 햇살 생생한 날. 부모는 ‘안녕, 나 왔어’ 하며 울어대는 아기를 받아들인다. 사랑하며 영원히 사랑하게 될 것을 보자마자 알아챈다. 포근한 변 냄새와 나란히 누워 함께할 내일을 그린다. 꿈꾸듯 춤추듯 사랑하며 뜨겁게 나누고 눈 흘긴다. 그리고 어느덧 32평 아파트의 고단한 밤을 맞는 나이가 된다.


부모의 눈이 세상의 전부였고 부모의 감정과 분리되지도 못했던 아이도 어느덧 자기 방식을 가지게 된다. 수많은 낯선 감정과 새로운 상처를 접하고 바닥을 헤아려본다. 불의에 분노하고 말 못 할 일이 생기며 누구를 실망시키기도 한다. 어설프지만 격렬하게 발견한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며 코를 골 무렵의 부모가 아는 ‘사실들’과 충돌한다.


부모는 그러다 보내준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환멸할 세상으로 나아가게 보내줘야 한다. 그렇게 자녀를 보낸 뒤 문득 자기가 누구였는지 어디를 향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여전히 어디를 향할 수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녀」는 그런 영화였다.



알려진 우주 vs 설레는 우주


사춘기 무렵 날밤이는 인용 장면 속 사만다와 비슷한 성장 단계였을 듯하다. 설렘과 경이, 뜨거운 이별과 상처, 이해받지 못하는 환멸과 외로움, 그리고 열정과 분노와 소유욕 같은 낯설고 미숙한 감정을 겪는다. 육체 없는 사만다처럼 표현법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얼마나 놀라운 자기발견인지 소중한 이한테 전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또 자기만의 성취로 고스란히 지지받고 싶어진다. 설레는 감정이기보다 감정들에 설렌다.


아빠는 이미 설렜던 사람이다. 웬만한 감정은 낡은 서랍 속에 구겨 넣은 잡동사니들이었다. 「미래소년 코난」을 꺼내 보면 딱 5분 재미있었다. 4월의 햇살을 처음 맞는 연둣빛 잎새의 설렘이나 어린 자녀를 안을 때의 빛나는 열정도 허접해 보였다. 겨우 남은 감정 에너지는 어쩔 수 없이 자녀 진로에 쏟는 경우도 많다. 사춘기 아들의 빛나는 설렘은 ‘자칫 치우치면 안 될 것’일 뿐이었다.


알려진 세계를 사는 이와 설레는 세계를 살려는 이의 충돌. 그게 사춘기의 근본 역학이었다. 단순 변심 진상 고객 응대가 절대 아니었다. 시공간·위치·운동의 기준이 완전히 다른 역학이었으며 한 관성계를 신생 복잡계에 밀어붙이는 충돌이었다.


날밤이의 견해란 처음 발견한 자기였다. 한때 “자라면 아빠 같은 아빠가 될 거야”라고까지 했던 그 아빠에게 당연히 지지받고 싶었을 게다. 있는 줄 몰랐던 우주를 환희로 배우며 감정에 설렜을 녀석을 아빠는 섣불리 꺾으려 들었다. ‘어설픈 대필 편지 아냐? 사실대로 말하면 반대일걸?’ 돌아보니 만행이었다. 외로웠을 테다. “지금 자기 모습이 너무 싫”었을 게다. 논술 능력 함양, 혹시 부모가 직접 하겠다는 토론 교육은 아무래도 사춘기는 넘긴 후가 좋지 않을까.


자기를 확신하지 못한 아빠는 아들의 확신도 흔들었다. 뜻처럼 풀지 못한 관계 속 상처의 꽈배기도 서비스 삼아 얹었다. ‘자식 잘돼라’는 예방 주사라 착각했을 수도, 감당하지 못한 사회관계를 자녀를 거쳐 위안 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에 대해 그렇게 내뱉은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감당하기 겁났던 탓 아니었을까.


그 무렵의 아빠는 공허함과 무력감이 자꾸 커지고 자존감은 낮아지려 했다. 버지니아 사티어 같은 저명한 가족심리학자는 자녀뿐 아니라 부모 자신의 자존감 회복 노력이 사춘기 갈등 해결의 첫 단추라고 했다.(『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 자기를 긍정하는 만큼 타인을 긍정한다는 말일 게다.


사춘기는 내 아들이면서 내 아들이 아니려는 과정이었다. 언제든 어디로든 가려 했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우화로부터 설령 거짓말은 3번까지 괜찮다 하더라는 교훈으로 나아가더라도, 아픔으로부터 행복을 맞고 행복에서 또 다른 아픔으로 나아갈 것을 믿어야 했다. 나 속의 수많은 나 사이의 오래 묵은 층간소음도 그렇게 품지 않던가. 그즈음의 부모는 다초점 렌즈가 필요할 무렵의 시력이었다. 설핏 보고 교환·반품하려 하지 말고 상담 예약만 해두고 해피콜백이 올 때를 기다리는 게 좋았다. 그렇게 새롭게 만나야 했다. 새로운 만남 안에서 ‘아빠’의 더 자란 의미와 정체성을 긍정할 수 있어야 했다.


더 설레는 마음을 지닌 채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아빠가 닿지 못한 어딘가에 닿아 있을 날밤아. 어디에 가 있든 용서하렴. 아빠는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겁나서 더 그랬음을 이해하렴. 언젠가 아빠처럼 두려워하는 이를 또 만나거든 흔쾌히 손 내미는 어른으로 자라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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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알려진 우주 #설레는 우주

인용대사 출처 : 「그녀」(Her), 안나푸르나 픽처스, 2013. (각본·감독 스파이크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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