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를 도와주는 너는 참 효자야.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초3 날밤이가 자기한테 쓴 편지 일부였다. 으흐흐 싶었다. 근데 가만, 이상하네? 그 무렵의 날밤이한테 정말로 뭔가를 ‘도와 달라’ 했을 만한 게 없는데? 그렇군. 도와줬다 여기기도 하는군.
양육을 위해 부탁 말투를 쓴 적은 종종 있었다. ‘식사하는데 정신없으니 바로 앉아줄 수 있겠니?’ 같은 식이었다. 뭔가 알려줄 때도 ‘피곤해서 그러는데 아빠 대신 좀 찾아봐 줄래?’ 같은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어린 날밤이에게는 그런 게 ‘도와주는’ 것이었겠구나. 부모의 바람을 부탁과 요구로 받아들였던들 뿌듯함과 자존감의 계기이기만 하다면 대수일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았던 모양이다. 초6 무렵이었나. 국어 공부 중이던 날밤이가 단호히 선언했다. ‘~ 하자, 해 보자’는 명령형 어미라고! 의무를 담았지 어떻게 제안을 담은 청유형이냐는 것이었다. 청유에 부드러운 명령이 담길 때가 없진 않다. 그래도 초등 국어 교과에 명백히 명령형과 따로 설명돼 있었다. 띵~ 했다. ‘~ 하자, 해 보자’체는 내 말버릇이었던지라…. 한 방 또 먹었다. 피고인 뒤에서 오리발 내미는 '~ 할래?'체, 너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주변 요구에 부응하는 걸 바른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심리적 발달 단계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연령대별 도덕성 발달 단계론은 잘 안 다가왔다. 당황스러웠던 건 날밤이가 아빠를 늘 뭔가 부지런히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하자’가 명령형이라는 확고부동한 선언은 자녀의 의사를 묻는 몸짓도 일단은 강요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박물관, 전시관, 과학관 가족 나들이 때도 종종 느꼈다. 시쳇말로 뽕을 뽑겠다며 구석구석 총총걸음했던 곳이다. 어린 날밤이는 기차 박물관의 디오라마 같은 전시물에 무아지경으로 빠져 있기도 했다. 부모는 뭐가 부족했던지 ‘이쪽 가보자, 저쪽도 가볼까?’ 하며 부지런히 권했다. 녀석은 그런 청유에 이쪽저쪽 내몰려 다닌 적이 왕왕 있었다. 절대반지를 탐하는 골룸의 눈빛을 뿜는 아빠의 열띤 해설에도 시달렸을 게다.
‘아빠 해설사’는 몇 가지 실수를 했다. 우선 설명 속도. 날밤이는 이해 속도뿐 아니라 시선 속도와 감정 속도도 달랐다. 다음은 눈높이. 관람 시선의 각도였다. 전시물 높이와 시선 각도는 대부분 170cm 성인 시선에 맞았다. 쪼그려 앉지 않는 한 부모 해설사가 자녀와 같이 바라보는 전시물은 같은 게 아니었다. 속도와 눈높이의 실수와 더불어 은연중이라 쓰면서 노골적으로 범한 실수는, 봐야 할 걸 정해준 것이었다. 우리는 정말 봐야 할 것을 제 속도와 제 시선으로, 그러니까 제대로 보고 있을까.
좀 지나니 박물관, 전시관 관람을 꺼리는 눈치가 보였다. 의기소침한 듯도 보였다. MBTI 유형 중 ENFP로 접근 중이었을까. ‘상대 마음을 읽고 세심하게 대응하면서 희생하는 충직함 혹은 닮아가면서 집중적 관계로 발전. 점점 다정다감해지는 반면 자기 존재감이 희석되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함’이라 적혀 있다.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려고 묵묵히 참고 견딘 시간 같았다.
부모의 선의는 날밤이에게 요구나 강압 혹은 의무이기 딱 좋았다. 전시물 유리창 앞에서 몇 시간 벌세운 꼴이랄까. 만약 그랬다면 뭘 또 어째야 했을까. 손흥민 허벅지가 되도록 쪼그려 앉은 채 아이 뒤를 졸졸 따라야 했을까?
어린 왕자. 경상도 발음으로는 애린 왕자, 사투리로는 얼라 왕자라 불리기도 하는 이다. 그이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엿볼 참이다. 생텍쥐페리의 자전적 동화소설 『어린 왕자』에서 철로 교환수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자.
『어린 왕자』 - 왕자 vs 철로 교환수
어린 왕자의 외계인 관람 여정은 결국 지구별까지 이어졌다. 고향별의 까칠한 장미 탓에 반강제로 새 친구를 찾아 떠난 여정이었다. 지구에서 사막과 높은 산, 그리고 장미 정원과 여우를 차례로 만났다. 이윽고 철로 교환수와 마주친다. 마침 승객을 가득 실은 급행열차가 교환수의 경비실을 뒤흔들며 지나치는 중이다.
“저 사람들은 정말 바쁘군요!” 어린 왕자가 말했다. “뭘 찾아가는 거죠?”
“기관사조차 모르고 있단다.” 철로 교환수가 말했다.
그 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불을 환히 켠 두 번째 급행열차가 천둥처럼 우르릉거렸다.
“저 사람들 벌써 되돌아오나요?” 어린 왕자가 물었다.
“같은 사람들은 아니야.” 교환수가 말했다. “자리를 바꿀 뿐이지(It’s an exchange).”
“살던 곳에서 만족하지 못했나요?”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결코 만족하지 못하지.”
그 뒤 세 번째 급행열차가 불을 환하게 켜고 천둥처럼 지나갔다.
“이 사람들은 첫 번째 기차 여행자들을 쫓아가는 건가요?”
“아무것도 쫓지 않는단다. (…) 그 안에서 잠에 곯아떨어지거나 하품을 잔뜩 하는 거야. 어린 아이들만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있단다.”
“자기가 찾고 있는 게 뭔지는 아이들만 아네요. (…) 아이들은 헝겊 인형에 시간을 쏟아요. 그러면 인형은 아주 중요한 게 돼요. 누가 그걸 뺏으면 소리 내 울고….”
알 듯 말 듯 500살 제다이 스승 요다처럼 말하는 어린 왕자. “토마스와 친구들, 화차를 끌고 밀고~” 같은 기차 애니메이션 OST를 노래할 나이에 어쩌다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게 됐을까.
처음 지구로 내려온 왕자는 사막에서 홀로 외로움에 사무쳤다. 모든 게 보여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는 고향별의 장미를 향한 그리움만 일었다. 5천 송이 장미 정원과 마주쳤을 때는 엉엉 엎드려 울기도 했다.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흔해 빠진 줄도 모르고 까칠하기만 했던 장미 한 송이와 무릎 높이 화산 세 개만 돌보며 지냈던 하찮은 처지가 생각나 서글펐다.
그제야 나타난 여우는 말했다. 네가 쏟은 시간 때문에, 먼 이곳 5천 송이 장미보다 네가 길들인 한 송이 장미가 소중하다. 정말 소중한 건 마음으로 봐야 보인다…. 쉬운 결론에 어렵게 돌아올 때 부쩍 자라기도 한다. ‘어른 왕자’가 이제 말한다. 제 자리에서 늘 볼 수 있는 걸 급행열차 승객들은 피곤한 하품으로 이쪽저쪽 이 별 저 별 자리를 바꿔야 볼 수 있다 여긴다고. 자기가 찾고 있는 게 뭔지 아는 건 유리창에 코 박은 아이들이었다고.
뭔가와 오롯이 관계 맺고 나서야 찾고 있는 게 뭔지 알았다. 깻잎 소비자와 달리 깻잎 농부는 잘 자란 잎은 잘 자란 잎대로 대충 자란 잎은 대충 자란 잎대로의 구실을 볼 수 있었다. 스치는 접촉보다 깊은 만남 속에서 배우고 허물며 채우는 자기 시간의 경이로움이 있었다. 어린 왕자의 여정은 외롭고 서글픈 현재의 초라함 속에 고유한 희열을 찾는 오래된 미래의 여정인 듯했다.
각자의 깊은 시간
뭔가를 만나는 시간은 깊어야 하나 보다. 여기저기 정해주는 자리를 따르기보다 자기만의 헝겊 인형을 만지는 시간 말이다. 박물관 유물과 과학관 전시물을 만날 깊은 시간을 위해 선택해야 했던 방식은 날밤이한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었다.
알아서 구경하고 다니도록 기다렸다. 만날 방법만 정했다. 손잡아 끌면 끌려가 함께 봤다. 15분 만에 집에 가자 하면 두말없이 돌아왔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시간 동안만 만나길 바랐다. 그러고 나니 몇 번이고 다시 갈 수 있었다. 오늘 못 본 건 다음에 발견해서 신났다.
부모는 기왕 할애한 시간이니 부모대로 구경했다. 부모의 대리만족을 두고 고마워하는 자녀를 별로 못 봤다. 날밤이를 통한 보상보다 스스로가 찾으려 했던 걸 떠올리며 관람하는 시간의 성실함을 누렸다. 그제야 ‘박물관 갈래?’가 청유형일 수 있었다.
지금 와 보니 내몰리듯 스쳐 간 전시물들 하나도 기억 못 하더라. 무아지경으로 하염없이 구경하던 모형기차 디오라마나 과천과학관 전통문화관을 돌아다니다 맡았다는 목향처럼 마음대로 누렸던 시간만 간직했더라. 그 시간이 녀석의 정체성을 채울 테다. 관계의 본질도 배움의 본질도 깊은 시간 속에서만 소중해졌다. 쉬운 결론에 어렵게 돌아왔다.양육의 출발은 온갖 감정을 돌고 돌아서야 어딘가로 돌아오는 일의 반복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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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와 요구 #각자의 시간 #전시관 나들이
인용 대사 출처 : A. de Saint-Exupéry, 『어린 왕자(Le Petit Prince)』, 1943, 프랑스. 2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