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기러기, 토마토, 인도인, 별똥별,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 변호사가 근무하는 로펌 식구 중에 권 변호사와 최 변호사가 있습니다. 둘이 한판 붙었습니다. 자폐 장애 때문에 사회적 약자라 여겨지는 우영우 변호사가 실은 대표가 내리꽂은 ‘낙하산’인 게 떠오르자 권변이 후끈 달아올랐던 것입니다.
“모르겠어요? 우영우가 강자예요!”우영우는 전례 없는 특채로 입사했고 동료 변호사들은 그녀의 장애를 보완해야 했습니다. ‘약자 배려? 위선 떨고 앉았네. 늘 배려 받는 우영우가 약자야?’ 권변 자신은 정작 받아야 할 배려를 못 받는 듯한 역차별에 성이 났습니다.
“무슨 수로 들어왔든 늦게라도 입사한 게 당연한 거라고!” 최변은 그렇게 맞받았습니다. ‘역차별? 금수저 강자야말로 온갖 특혜자 아냐? 로스쿨 성적이 탁월했던 우영우지만 장애 탓에 아무 데서도 채용하지 않았잖아? 우영우가 입사 못하면 그게 바로 차별이야!'
열 받은 권변은 모략을 품은 채 경쟁 로펌을 찾았고, 최변은 그런 권변을 의심하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둘의 바람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릴 권리가 있는 이가 누리며 누릴 권리가 있는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 공정이었습니다. 둘 다 부족한 공정 너머 더 공정한 공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툼이 종종 그렇더군요. 한 방향을 보는데 서로 할큅니다.
자주 본 찝찝한 풍경이었습니다. 날밤이와 갈등이 그럴 때가 많았습니다. 아빠와 녀석은 즐겁고 편한 부자 간 만남이라는 같은 방향을 바라봤지만 어느 때부터 서로 사나워졌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애썼지만 여전히 파도 많은 아빠와 아들 사이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던 가수 전인권 씨가 생각납니다만 아빠와 아들의 지난 만남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외진 동네에서 길렀다면서요? 중3 때까지 보습학원 한번 안 보내셨다면서요? 그런데도 어쩜 그렇게 키우셨어요? 불안하지 않으셨어요?’ 자주 물어오셨습니다. 여러 이유로 민망해서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자녀와 옥신각신하는 분들께 뭐가 됐건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려야 한다면, 제 경우에는 신뢰 관계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애썼다고 말씀드릴 도리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들의 성장 단계에 맞춰 아빠 모습을 고치려 애쓴 과정이었습니다. 늘 한 걸음씩 늦기에 겪었던 괴로움과 창피함과 외로움과 만나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INTJ는 육아마저도 트렌드에 둔합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INTJ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들과 보낸 시간 동안 꺼끌꺼끌해서 묻었던 감정들을 아빠라는 이름으로 똑바로 마주하는 활동이었습니다. 헤집어 떠오르게 한 뒤 숨거나 날아가지 못하게 꽉 움켜쥐고 이리 저리 돌려가며 마주하려는 정신의 집요한 활동성, 그러니까 온 힘으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다 생각하면 다시 생각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녀석에게 계속 얻어터지더군요. 곰곰 생각해 보니 다시 생각한다는 건 다 생각했다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어나 앉았습니다. 바뀌는 아들을 탓하기보다 바뀌지 못하는 아빠를 사과하고자 애썼습니다. 끝까지 맞서면 ‘그럼 니 생각대로 먼저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때껏 오래 높이 쌓아왔던 ‘나’를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사과는 억울하고 힘들었습니다. 사과하면 삶이 바뀐다고 합니다. 사과에는 온 인생이 필요하다는 말 같았습니다. ‘너 잘되라고 그랬지, 내가 그 동안 뭘 그리 잘못했는데!’ 자녀에게 미안하다 해야 할 때는 양육의 시간 전부가 점수 깎이는 기분이더군요.
사과한다는 건 ‘있는 게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원리를 시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생뚱맞으시죠. 하나마나한 듯한 이 말은 서양철학의 시조새 파르메니데스가 밝힌 원리입니다. 존재론의 제1원리이며 참된 인식의 가능 조건이기도 합니다. 제게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과할 수 있게 하는 원리이자 함께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라 여겨져 잠깐 말씀드릴까 합니다.
행여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있으신지요? 노트북도 법칙도 상처도 희망도 고통도 배고픔도 심지어 상상 속 동물도, 모든 것은 있기에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가 다를 뿐이었습니다. 눈앞에 또렷이 있기도 하지만 사소하게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어제에 있거나 내일 속에 있거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지요. 어떻게 있든 있는 것만 떠올릴 수 있으니 떠오르는 모든 게 없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나와 너에게 다르게 있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에 달리 있었고요. 서양철학 시조새Ⅱ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했습니다. 강물은 어제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니, 있는데 그대로 있지 않고 흐르고 변하면서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있는 것만 있다는 앎을 제외하고 어떻게 있는지를 다루는 세상의 모든 앎이 불완전한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게 있는데 어째서 내게 없어 보인다고 네게도 없다 말할까요? 모든 건 달리 있는데 내게 이렇게 있다고 너에게도 그렇게 있다 우길까요? 모든 건 변하는데 어째서 오늘 이렇지 않다고 어제도 그렇지 않았으며 내일도 그렇지 않다 여길까요?
그랬습니다. 자기 눈에 상처로 여겨지지 않으니 일반적으로 별 일 아니며, 따라서 상대에게 준 상처도 없다고 여기는 한 사과는 억울했습니다. 몰랐던 것, 그러니까 없다고 여기거나 비현실적이라 여긴 게 실은 다르게 있을 뿐 없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자기가 이러한 줄 알았는데 실은 네게는 저러하더라는 걸 받아들이는 시간은 괴로웠습니다.
별 상처 주지 않아도 별 상처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어떻게 다르게 있는지 깨달아야 했습니다. 부모 속의 답과 선의만 뱅뱅 도는 걸로는 안 됐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일단 네 생각대로 먼저 해보자’가 좋았습니다. 내게 있는 게 어떻게 부족하게 있는지 비춰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제야 억울하지 않은 사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일 그러니까 용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어려웠습니다. 자기도 똑같이 부족하다는 걸 시인할 때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역시 허물 많고 불완전하기에 아빠와 아들의 '신뢰 관계'라는 것도 자기 생각 같아서가 아니라 자기와 다르기에 믿는 관계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사과하고 용서하는 법의 시행착오를 아빠와 아들 각자의 방식으로 거치고 있습니다. 상대 말과 제안에 한 번 더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상대 말이나 태도를 물고 늘어질 문제라기보다 자기를 바꿔야 할 문제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부자 관계도, 학업도, 성장도 그러면서 한 계절씩 여무져 온 듯합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좌충우돌한 다음에야 사람 간의 만남을 잇는 소중한 다리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A와 B가 살았습니다. 모든 게 서로 다르며 불완전하고 서툴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둘의 만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다르고 불완전한 사람들 간 이해와 신뢰와 사과와 용서의 다리는 어떻게 놓일 수 있던가요.
‘다르고 불완전한데도’라기보다 오직 ‘다르고 불완전한 덕분’이었습니다. 부족하고 달라서 공통의 다리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 갸웃하시겠지만 곰곰 돌아보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좀 깁니다. 알 만한 얘기다 싶으시면 다음 글 묶음으로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서로 다른 A와 B를 잇는 다리는 얼핏 여러 가지 같았습니다. 우선 이해관계를 떠올려 봤습니다. 잠시 같을 수는 있어도 A와 B를 잇는 근본 원리라기엔 약했습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다리니 말입니다. 신념 같은 건 어땠나요. ‘공정’을 두고 같은 상황에서 A는 공정하다 B는 불공정하다 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A 저 인간 배부르니 저런 소리 하지’하기도 하더군요. 학연·지연·혈연 같은 다리는 어땠나요. 안 변할 것 같다가도 소리 소문 없이 끊기기도 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또 어땠습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만 아팠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 같은 모두의 기쁨도 잠시 잠깐의 연결 다리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굳건한 다리를 찾는다면 그건 괴로움이었습니다. 타인과 어울려 살기에 A가 겪는 괴로움에 B 역시 마음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때 A와 B 사이에 여물고 끈끈한 다리가 놓였습니다. 이해관계나 신념이나 학연이나 질투나 눈치나 체면에 괘의치 않고 누를 수밖에 없는 ‘정말로 좋아요’의 안전한 다리였습니다.
심지어 원수 사이나 전쟁 상대국 국민 사이에서조차 생기는 다리였습니다. 서로의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 괴로움 너머를 함께 염원하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A 홀로는 다 어찌지 못하는 괴로움일수록 자신과 다른 B를 받아들여 손 맞잡고 이겨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적대국 국민 간 ‘평화를 향한 연대’ 같은 연결이 만들어지는 이유였습니다.
연결이라는 말 대신 용서라는 말로 바꿔도 역시 괴로움이 다리였습니다. A가 B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A에게 상처를 준 탓에 말입니다. B도 이다음에 A를 용서하지 못하겠지요. 일단 주고받은 상처는 무슨 수로도 없던 일이 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B가 진심으로 A를 용서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마음이 넓어서겠지요. 그 넓음이 그저 각자의 수양이나 선택이라기보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가장 깊은 원리라는 걸 알 것 같습니다.
B가 A를 진정 용서하게 되는 경우는 한 가지였습니다. B를 용서하지 못해서 겪는 A의 괴로움을 느낄 때였습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던가요. B 역시 A 같은 타인을 쉽게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 할 때였습니다. B도 A와 다름없이 상처를 주는 서툰 존재이거나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라는 괴로움에 똑같이 젖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원망과 자책의 밤을 보내고 나서야 B를 용서하지 못한 A가 용서될 수 있었습니다. 둘 다에게 용서 공인자격증이 없다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나눌 수 있기에 비로소 진실한 용서가 가능했습니다. 용서는 하는 것이라기보다 되는 것이었습니다.
A는 자기가 상대에게 준 상처를 살피는 것보다 자신이 상처 주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괴로움이 더 컸습니다. B도 자기가 입은 상처에 슬프기보다 자기가 상처 입는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괴로움이 더 버거웠습니다. 어째서 A라고, 혹은 B라고 상처 입거나 상처 주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게 기본값이었습니다.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괴로움과 받아들일 배짱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이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었습니다.
괴로움이라는 공통 다리는 왜 생기던가요. 누구나 주고받는 상처의 괴로움이 어떻게 생겨나던가요. 시야가 비좁아서건 아드레날린이 폭주해서건 결국 A와 B가 서로 부족하고 서툰 탓이었습니다. 그 변변치 못한 허물 ‘덕분에’ A와 B에게 동질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홀로 다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과 분노와 외로움과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뒤엉키는 동질감 말입니다. 부족한 자기를 느끼는 깊이와 너비만큼 부족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비극적 동질감이 서로의 간격을 끈끈하게 메우는 다리였습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상처를 주고받는 A와 B. 누구나 서로에게 이상하고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상처 주는 존재일 리 없다고 여긴다면, 주지도 않은 상처를 입었다는 이와 연결되는 건 불가능합니다. 상처 입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 믿는 이는 또 어떻게 상처 준 이가 용서되겠습니까. 그런 완전한 이가 다른 이를 향해 어떻게, 뭐 하러 다리를 낼까요. 서로 불완전하기에 주고받게 되는 상처의 괴로움이 서로 다른 이들을 단단하게 잇는 유일한 다리인 한 우리는 오직 부족해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부족하다는 건 다르다는 말이었습니다. A와 B가 부족하기에 같은 걸 놓고 A는 이쪽 면을 바라보는데 B는 ‘다른’ 면을 바라봤습니다. 둘 다 완전하다면 다르게 볼 리 없겠지요. A가 입었다고 주장하는 상처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A가 보는 A’와 ‘B가 보는 A’가 서로 다른 것은 둘 다 부족하게 바라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게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의 공통 다리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오직 다르기에 연결됩니다.
A와 B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할까요. A는 자기와 안 맞는 B들이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서로 부족하고 다르다는 허물 덕분에 생기는 다리를 건너다닐지, 아니면 부족한 B 탓에 다리를 끊고 섞이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A의 몫입니다. 자기를 고립시켜 견딜 만하면 일단 고립을 택했습니다. 스트레스 유발 요인에 맞서 균형을 지켜내려는 1차적 거부 반응, 그러니까 면역력의 발현이겠지요. 애초 고립 성향이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립을 무너뜨리는 괴로움과 슬픔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왔습니다.
고립은 대게 자기가 알던 자기의 틀에 머물며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탈출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자기 모습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아차릴 때가 생겼습니다. A가 자기와 너무 다른 소중한 이에게 걷어차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자기가 알던 자기, 자기가 믿던 자기 모습이 그 관계 속에서 가로막힐 때 상처 입었고 위축됐습니다. 자신을 꾸미는 일을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괴로움과 슬픔이 계속 자라 더는 꾸밀 수 없게 됐습니다. 지금껏 믿던 대로의 모습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의 눈물을 쏟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관계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의 틀을 내던져 버리고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를 것만 같은 심정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A를 넘어 바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실한 인간관계로부터 받은 괴로움일수록 더 그랬습니다. A는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것과 어렵게 섞일 때 자랐습니다. 고등생명체가 애초에 그랬습니다. 고등동물의 생식 전략은 사실 번거롭습니다. 암수 한 몸이 아니기에 서로 다른 부계와 모계의 몸 속 유전자가 섞여야 되는 일이었습니다. 수억 분의 1 확률을 뚫고 말입니다. 그래도 번거로운 섞기 전략을 고집한 덕에 부모 세대에 치명적이었던 병원균을 다음 세대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A가 낯선 B와 섞이지 않고서 바뀌던가요. A 마음과 맞선 B의 시선과 괴롭게 만나지 않고서 자라던가요. 자기만 아는 이가 자기에 대해 무얼 알던가요.
다르고 서툴러서 연결된다는 비극적 현실의 원리, 그 원리를 가로지르며 만나는 덕분에 A와 B가 자라더라는 희극적 현실의 원리. A와 B의 만남은 애초부터 이 원리 위를 숨 쉬고 있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원리라 있다고 잘 느끼지도 못하는 원리였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그들을 숨 쉬게 하는 공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느낀 걸 다르게 느끼는 순간이 성장이었습니다. 혼자 보다가 함께 섞여 보게 되거나, 하찮은 줄 알았으나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거나, 있는 줄 꿈에도 몰랐으나 없지 않음을 알아채거나, 눈앞에는 없으나 내일 있음을 배울 때 자랐습니다. 뼈아픈 순간이었으되 조금씩 명랑하게 웃게 되는과정이었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지혜로운 분들의 옛날이야기를 나름대로 각색했을 뿐입니다. 고개 끄덕여지는 분이 계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분이 계신다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다름 아니라 이야기 속 A 혹은 B를 ‘나’로 바꿔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어떠신가요? 아까와 달리 끄덕이기 꺼려지는 부분이 많지 않던가요? 저도 그렇더군요. 주인공이 ‘나’로 바뀌는 순간 끄덕이기 싫고 끄덕일 배짱도 안 생기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그렇듯 눈높이에 못 미치는 존재였습니다. ‘나’의 벽을 허물기가 버거워 상처를 숨기거나 상대의 부족함을 탓하기도 하는 서툴고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넘어서 '우리'로 자랄 가능성을 열어줄 나와 너의 단 한 가지 연결점이었습니다.
'나'에 갇혔던 무렵의 아빠는 아들에게 얻어터졌습니다. 생각해야 했습니다. 과한 생각은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만 저는 해답이 필요했습니다. 머리가 아프면 말로 생각했습니다. 말문이 막히면 가슴으로 생각했습니다. 가슴마저 답답해지면 눈물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어찌해도 차마 더 생각하지 못하겠거든 생각을 멈추면 아빠가 아니라며 생각해야 했습니다.
완전한 것의 주인이 되기엔 비좁기 그지없는 존재라는 진실을 속속들이 받아들여야 했을 때, 또 A나 B 자리에 ‘나’를 집어넣는 걸 두려워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때 아빠는 간신히 한 발 자랐습니다. 아빠와 아들의 만남에 그 많은 스트레이트와 훅이 오간 것은 그 데미지 속에서 성장의 희열을 맛보라는 어느 분의 속 깊은 안배였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교육이나 육아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7만 년쯤 됐다지요. 날밤이가 즐긴 목공 기술의 역사는 그에 비하면 무척 짧습니다. 넉넉잡아도 5천 년 전 미노스 문명 때부터라더군요. 5천 년짜리 목공술의 핵심을 담은 공통 교과서와 대학 강의는 널렸더군요. 그런데 무려 7만 년 간 연마된 육아술에는 공통 교과서가 없었습니다. 부모I 중간고사나 자녀Ⅱ 기말고사 족보를 본 적도 없거니와 애초 부모학과·자녀학과라는 말도 못 들어 봤습니다.
육아가 배워서 소유하는 기술이기만 하다면 양육의 기쁨은 육아·자녀교육 전문가만의 몫이겠지요. ‘SNS 네이티브’가 자라는 시절이니 어쩌면 SNS 전문가만 잘 할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아에 정답이 없다는 건 기술의 습득보다 이제껏 안다 여겼던 기술에 대한 성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 아닐까요. 끊임없이 변하기에 돌아봐야 하는 만남의 장이라는 말 같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뛰어난 인류 종은 많았다고 말합니다. 불을 더 빨리 사용했거나 덩치가 더 컸거나 뇌 용량이 컸던 종도 있었다지요. 부족함투성이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습니다. 연결되려는 생존 유전자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끝이 없는 만남이 우리 삶을 꿰매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부모와 자녀의 만남은 부족하고 이질적인 것 사이의 만남에 대한 가장 깊숙하며 진지한 거울 가운데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 속 말다툼과 육아 갈등을 연결시켜 리뷰하기, 말다툼하는 두 인물 사이의 다리 찾기, 서로 다른 보드게임을 합쳐보기, 한 게임을 여러 규칙에 던져놔 보기, 나 속의 서로 다른 나를 화해시키기, 나와 맞선 타인과 다리 놓기…. <이렇게도 아버지가 되더군요>의 모든 글은 말하자면 한때 아빠와 아들의 놀이였던, 이질적인 걸 이질적인 채로 연결시키는 공통점 찾기 놀이입니다.
초등 저학년 무렵 날밤이가 방문을 닫아 건 채 메모를 써 붙였습니다. 과제를 미처 못 끝내 야단을 들었나 봅니다. “엄마, 이번엔 정말 속상해서 편지 쓴다. 엄마가 이 편지를 보고 ‘어머~ 이번에는 글씨 잘 썼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처럼 엄마가 ‘날밤아~ 어디까지 했어~? 조금만 더 할까?^^' 이렇게 다정하게 얘기해줄 줄 알았는데…. 하지만 하루 분량은 다 했어. 할 말 있으면 메시지 적어 넣거나 노크해 줘. 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혼자 씩씩거렸던 모양입니다. 깊은 ‘빡침’도 드러났고 방문을 닫아 건 자존심도 높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일단 상대 요구를 받아들이는 마음, 위로를 주고받고픈 간절함, 뭣보다 여전히 다리를 내려는 손짓을 잃지 않았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아들도 이 메모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눈높이 같지 못한 우리라서 서로를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뼈아픈 동질감이야말로 우리가 ‘강 vs 강’으로 맞선 채 서로를 포기하기보다 ‘강 약 약, 중간 약 약’으로 섞일 실제적 방안을 모색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서로 속상해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러다가 어제의 라운드를 돌아보고 다음 라운드를 함께 바라보며 웃게 하는 유일한 지렛대이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니 완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