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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벌레 May 05. 2024

Round 9. 격투의 서곡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2)

"응. 애! 응. 애!” 갓 난 날밤이는 명확하게 울었다. 한 음절 한 음절 딱 딱 끊기며 발음되던 그 파장은 무거운 어둠을 찌르며 직진했다.


새벽 4시 기어이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옆지기는 생후 200일쯤 된 녀석을 품고 뒷좌석에 주저앉았다. 근처 모 국립대학을 향하는 길. 녀석을 재울 때는 TV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빗소리 CD도 한방약도 의미 없었다. 자동차 엔진의 일정한 저속 진동만 그나마 먹혔다. 안 멈추고 저속 직진을 유지할 수 있는 곳. 국립대학 교정은 넓어서 좋았다. 꽤 오래 직진할 수 있었고 차도 사람도 신호도 없었다. 과속방지턱에만 긴장하면 됐다.


몇 바퀴 기다 보면 잠들었다. 숨 죽이며 돌아왔다. 주차. 엔진 정지. 잠든 병장 불침번 교대시키듯 안아 내렸다. 역시 깼다. 이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다시 태웠다. 다시 갔다. 다시 돌았다. 새벽 어스름 빛에도 여전히 캄캄했다. 내일 밤도 같을 테니.


출입처로 곧바로 출근한다고 뻥 치는 날의 연속이었다. 방송 기자 시절이었다. 급한 제보인 듯 전화통을 붙잡고 사무실로 뛰어들곤 했다. 다들 알면서 넘어갔다. 몰골은 잘 모르겠다. 거울을 못 봐서. 그렇게 매일 뉴스 화면에 세숫대야를 내비쳤고 한 선배는 시청자 우롱하냐 했다. 개국 1년쯤이었던지라 인력과 장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메인뉴스를 송출하고도 잔업이 남아 10시 넘어 귀가했다. 전설의 고향처럼 내걸린 하얀 천 기저귀 빨래들. 옆지기는 고집스레 그걸 덮어쓴 채 울고 있었다.


절박하셨을 우리네 부모님들처럼 나 역시 오늘 밤은 녀석이 10번만 깨기를 하느님, 옥황상제, 용왕님께 빌었다. 두 번 징집되는 꿈을 시간당 두세 번 꾸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는’ 나날은 돌이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선대의 60갑자 내공 소유자로부터 은밀히 전하는 신공은 과연 있었다. 잠든 발로 요람 흔들기. 되더라.


출산 때 옆지기는 40 몇 시간 진통했다. 그네타기, 수중분만 다 해봤다. 진통 이틀째 나는 장모님께 부탁드리고 옆 병실에서 두어 시간 쓰러졌다. 그 탓에 지금껏 까이고 자자손손 까이게 생겼다. 무엄하게도 옆지기 심경을 아뢰진 못하겠고 제왕절개의 ㅈ자도 안 꺼내셨던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잊지 못할 분이다.


그렇게 이 격투를 시작한 녀석은 끝없이 울고 필사적으로 안 잤다. 세타파와 방추파 같은 수면 뇌파 이론, 영아의 측두엽 해마 용량에 관한 정보, 렘수면이니 비렘수면이니 하던 각성장애 소견…. 정보를 묻고 캐는 게 직업이었던 아빠의 온갖 논리와 정보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냥 말이 안 됐다. 어느새 그런 거 알 시간이 나면 업무 중에 숙직 침대로 숨어들곤 했다. ‘섬집 아기’ 몇 번 불러주고 나온 뒤 거실을 바다표범처럼 뒹구는 꿈이라도 한번 꾸고 싶었다.


두 돌을 앞두고 잠 주기는 좀 나아져 주셨지만 당일을 넘기려는 의지만은 멈추지 않았다. 민주 시민의 사고회로가 끊긴 지 오래인 부부는 이혼을 입에 담기도 했고 둘째는 엄두도 못 냈다. 어린이집에 등원해서도 낮잠 루틴 시간에 교사는 회의도 마다하고 책을 읽어줬고 울음을 달래야 했다. 날적이에는, “나 안 잘 거야” 하며 버티다가 잠들면 깨나자마자 하는 말이 “나 안 잘 거야”였다고 적혀 있다. 다른 애들까지 못 자서 교사가 애태우고 있으면 “내 잠은 잠들어 버렸나 봐. 안 온대” 했단다. 그래서 날밤이다.


우사인 볼트처럼 이어 달리던 온갖 염증이나 한밤의 40도 열꽃과 경련, 그리고 온몸의 가려움 등도 지내다 보니 지내졌다. 크려고 그랬나 보군, 뭐 하나 가릴 것 없이 예민한 체질에 알레르기가 겹쳤을 뿐이었군. 세월은 흐르고 기억은 흐릿해졌으며 느낌도 덤덤해졌다. 딱 한 가지 느낌만 제외하고. - 스타카토 울음에 휘감긴 그 강렬한 에너지 그리고 뒷걸음질 치던 내 불편한 두려움이다.




신혼 때 싯누런 황사가 덮인 날이었다. 자욱한 흙냄새를 칵칵 밭아내며 다짐했다. 사람 살 곳이 못 돼. 얼마 뒤 지역 민방에 지원했다. 그렇게 내려간 지방이었건만 거기도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전히 지리멸렬했고 치기 어린 내 환멸과 무력감도 덩달아 커졌다. “차암 아름답다 아름다워”. 몇 년 뒤 송강호 배우가 「우아한 세계」에서 연발했던 대사는 어쩌면 그리도 입에 착 붙던지.


. ! . !’가 시작됐다. 짓눌린 어둠을 찢겠다는 듯 뻗어 나오던 일직선의 에너지. 이리도 안 자며 저리도 자지러지게? 생명의 설렘이나 인체의 신비감이라고만 하기엔 날 선 버거움이었다. 더 적나라하고 확고한 무엇. 의지라 이름하기엔 훨씬 원시적인 어떤 욕구. 온갖 괴로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듯 시뻘게진 몸으로 쫙 뻗은 사지를 떨며 뿜어내던 원초적 날카로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까지? 여기서? 뭐 하러?’


그 무렵 그 물음의 타깃이 날밤이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에게 뭔가 기대하지 말자며 나자빠진 내가, 그래서 뭐 어떻게 대단하게 살 건데? 라며 내 바닥을 휘젓는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갓 감아올린 미역 뭉치 같았던 서른 즈음의 마음을 후벼 팠고 지리멸렬했던 의미의 논리를 뒤집으려 했다. 미래를 어떻게 칠해야 할지 모르는데. 건드리지 마라.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불려 나오려는 에너지를 자꾸 외면해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갓난애 울음이 다 그렇지 뭔 말이 이리 장황하냐…. 오래 남는 건 표현하기 힘든 것들이라는 말은 역시 옳다. 서툰 그물질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그게 날밤이 속 에너지이기만 할까 싶어서다. 또 하나, 더는 내 일상에 개입하지 않을 유적일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60살 무렵의 러시아 대문호도 그런 종류의 에너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이반과 알료샤 형제의 대화는 이 에너지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이반 vs 알료샤


카라마조프 가의 둘째 아들 이반은 사랑하는 여성 카체리나에게 실망했다. 카체리나가 이반의 형 드미트리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드미트리에 대한 그녀의 드높고 신실한 사랑이 실은 도덕적 우월함을 자랑하려는 오만함일 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위선을 꿰뚫는 악취미를 지닌 우울한 인텔리겐차였다.


그럼에도 이반은 더 큰 세상 모스크바로 길을 나서려 한다. 죽어 있는 것들을 부활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결심을 동생 알료샤에게 밝힌다. 러시아정교회의 독실한 수도사 알료샤는 평소에는 이반이 수수께끼처럼 보였지만 이제야 스물세 살짜리 풋내나는 청년다워 보인다고 말한다. 이반이 답한다.


이반  :  (…) 내가 삶을 믿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환멸하고 세상의 이치에 흔들린다 할지라도, 심지어 세상만사가 무질서하고 저주받은, 그래서 어쩌면 악마의 카오스라는 확신이 생겨 인간적 환멸의 모든 공포로부터 두들겨 맞더라도 나는 여전히 살기를 원할 테야. 그리고 일단 그 술잔에 입을 댄 이상 다 비우기 전까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을 거야! (…)

나는 수없이 자문했지. 내 마음속의 삶에 대한 갈망(thirst), 이처럼 열렬하고 어쩌면 투박한 갈망을 이길 만한 절망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하고 말이야. (…)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스르고 있지만 살고 있어. 자연의 법칙은 믿지 못해도 봄이면 끈적하게 싹을 틔우는 작은 이파리들을 사랑해. 푸른 하늘을 사랑하고 가끔 별다른 이유 없이 정이 가는 사람들을 사랑해. 그렇게 사람들이 쌓아온 위업을 존중해. 가끔 그것들을 향한 믿음이 멈출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유산으로서 그것들을 존중해. (…) 나는 절망해서 우는 게 아냐. 그저 눈물 속에서 행복해지려는 거야. (…)


알료샤  :  정말 멋진 말이야, 형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다니 나도 너무 기뻐. 모든 사람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반  :  삶의 의미보다 삶을 더 사랑하라?


알료샤  :  반드시 그래야 해. 형 말대로 논리에도 불구하고(regardless of logic), 반드시 논리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해야 해. 오직 그래야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 (…) 형은 일의 절반을 이미 성취한 거야, 이반. 형은 살고 싶어하니까. 이제 나머지 절반을 위해 노력하면 돼. 그러면 구원받을 거야.


이반은 덧붙인다. 세상이 비록 죽은 이들의 큰 묘지일 것이 두렵지만 그래도 비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더 큰 기쁨의 눈물에 젖겠다는 것이다. 온갖 것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갈망, 그러니까 ‘피할 수 없는 부정적 자극에서 벗어나겠다는 몸과 마음의 격렬한 움직임’에 기대겠다는 이반. 그리고 그 목마름이 다름 아닌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알료샤…. 두 형제의 입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에너지가 의미나 논리보다 더 깊숙한 충동 아니냐고 묻는다.



절반을 성취하는 Big Bang


살겠다는 충동에 대한 주류 뇌과학의 설명을 접한 적 있다. 결국 내·외부의 불편한 자극에 대한 뇌의 강한 물리적 반응 아니냐는 것이었다. 냉장고로 가려는 의지가 뇌에 전달되면 뇌가 팔다리에게 명령하는 순서가 아니라, 배고픈 자극에 대한 뇌의 전기 반응이 가장 먼저 있어 냉장고행을 선택하는 이른바 자유의지를 산출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관점이면 날밤이도 자극에 강렬하게 반응하는 뇌를 지녔던 거다.     


많은 옛 철학자도 ‘의지보다 근원적인 의지’에 대해 어려워했다. 정념(passion), 욕구, 인상과 관념 같은 개념을 사용해 이 억누르기 힘든 충동에 관해 탐색했다. 그 실체를 어떻게 규명하고 발현시키며 제어하고 벗어나야 할지 두려워했다. 대상으로부터 생기는지 내 속에서 나오는지조차 어려워했다.


갈망의 실체가 물리적 반응일 뿐인지 어떤 추상적 정념인지, 혹은 독실한 교회 신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삶 자체에 대한 사랑’인지 알지 못한다. 알료샤가 말하는 나머지 절반이라는 것도 윤리, 신앙, 논리, 과학, 제도를 포함한 또 어떤 경우의 수로 채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실체를 밝히는 일은 어쩌면 학자의 몫이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갓 스물 풋내기 입을 빌어 실체보다 그 속성을, 그중에서도 효력을 말한다. 삶의 반은 이미 먹고 들어가는 거라고.


내 속에서 효력을 느낀다. 그것 없는 오늘은 한낱 무기력할 뿐임을 알겠다. 그것은 늘어지는 뱃살을 눈앞에 두고서도 식스팩을 떠올리게 했으며 오래 접은 글을 다시 쓰게 했으며 어쩔 수 없이 다수결되지만 언젠가 더 나은 판단에 가까워질 것임을 믿게 했다. 앞에 결핍된 것을, 오늘 없지만 내일 있을 것을 상상하게 하는 염원임을 알겠다.


오늘을 벗어나는 것은 또 어제를 만나는 것이니 그것 없는 우리는 어제로부터 외따로 멀어진 줄 모르는 외톨이임도 알겠다. 그것은 시간의 비석 하나 세워주고 돌아섰던 나의 미아들에게 마침내 보내는 입맞춤이었다. 없는 듯 있는 역사를 만나게 하는 용기임을 알겠다.


“응. 애! 응. 애!” 아빠를 뒷걸음질 치게 했던 그 에너지를 날밤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겠다는 타는 목마름으로 태어났음을 아빠가 또렷이 목격했으니 날밤아 너는 잊지 마라.


혼란의 모든 순간에도 삶을 살 것임을 확신해라. 두려워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대면해라.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우주를 초속 수백km로 운동하잖니.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파 누웠을 때도 나아가고 있음을 의심하지 마라. 온갖 논리와 말에도 불구하고 날밤을 새며 울던 태초의 의지가 네게 있다. 이미 절반을 이뤘단다. 우리가 언젠가 그랬고 또 그럴 것임을 의심하지 않듯 그 힘으로 나머지 절반을 향해 나아갈 것임을 한순간도 잊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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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 대사 출처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880, 러시아. Part 2 book 5 chapter 3. 발췌 번역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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