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 대신 책 면지에 남은 마음들
책으로 사람이 만나더군요. 책이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책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납디다.
청춘과 청춘이 종이책으로 연결되던 흔적을 몇 장 올립니다. 시간의 더께가 쌓인 제 책장 한켠에 용케도 살아남은 편지들입니다. 편지글이되, 편지지가 아니라 책의 면지에 담겨 오갔던 마음들입니다.
90년대 초중반. 담쟁이로 뒤덮였던 한 고풍스런 사과대 건물 반지하방에서 풋풋한 대학 시절을 보내던 청춘들은 서로를 향해 책을 사서 선물하곤 했습니다. 마음으로 눌러 쓴 손글씨들과 함께요.
일주일 점심값을 털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었잖습니까.
호주머니 속 꾸깃꾸깃한 밥값으로 책 선물을 하기 위해 일부러 책방에 들러야 했습니다. 그러다 행여 책방 메모판을 힐끗하기라도 해버리면 곧바로 시험에 들곤 했지요. 그날 밤 술자리 정보 메모가 한가득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책방 안에서 종종 지인과 마주치는데 그냥 헤어지는 것도 섭했죠. 그런 유혹을 다 물리치며 산 책들이었으니, 일단 지가 먼저 읽고는 선물이라고 내놓는 놈 꼭 있었던 거 기억하시는지요. 그러니 반드시 본전을 뽑으라는, 이모티콘이란 게 있었다면 'ㅠㅠ'라고 덧붙였을 법한 메시지를 적은 놈도 있었고, 두세 명이 돈 모아 사준 책도 있었지요.
금서로 지정돼 절판돼버린 책을 어렵게 구해줬더니, 술에 떡이 된 탓에 잃어버렸다면서 저를 슬슬 피해 다니다 재출간이 되자마자 hahaha거리며 다시 제게 선물한 후배도 있었고, 자기 생일 선물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니 저더러 오래 살아야 한다던 어여쁜 후배는 지금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군요.
'삶의 방향을 정하는데 보탬이 되시라'면서 한밤중에 검붉은 맑스엥겔스 전집을 사들고 와서는, 그날부로 석 달 반을 제 자취방에 빈대 붙던 후배의 메모도 남아 있네요^^; 제 복학 소식을 듣고는 뿔 달린 선배일 거라고 상상했다면서 저를 빵 터지게 하더니, '씩씩하게' 살자는 말을 남긴 채 몹시도 추웠던 그 다음 달 세상과 작별한 후배의 유서 같은 메시지도 남았고요.
‘폭탄과 더불어 살아야한다’ 케쌌던 치기 어린 말들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경청해 줬던 친구는, 요즘에도 한번 전화 오면 1시간을 횡설수설하며 무거운 세상 앞에 고군분투하고 있고, 그 시절엔 학생증처럼 여겼던 어설픈 철학적 고민을 달고 살던 친구는 지금은 누구보다도 신나게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비판의 무기를 들기 전에 무기부터 비판하자던, 귀신이 씨나락 까먹다가 요강 들고 농구 하는 소리를 해대던 늘 성난 친구는 노동운동에 매진하며 연말에 후원금을 삥 뜯어가곤 합니다. 쓴 소주가 빠질 수 없던 시절, 핏대 선 삿대질을 해대며 서로에게 혹독한 짐을 선물하면서 그 짐만큼 또 뜨겁게 서로 기대하기도 했던 열정들의 분투도 구불구불한 글씨로 남아 빛을 내네요.
신상정보가 드러나거나 좀 내밀한 마음들은 못 올렸습니다만, 떠나면서도 한사코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이별의 마음이나 낯 붉어지는 고백 같은 메모도 남았군요. 간절했거나 절실했거나 아팠던 열망의 흔적들과, 남루했고 투박했고 서툴렀던 마음들이 활자 하나하나로 되살아나 말을 거는군요. 두고온 게 없냐고 빤히 묻는 듯도 하구요.
전화 통화를 하려면 자기가 누군지 공손하게 밝힌 다음 누구 좀 바꿔달라 해야 겨우 할 수 있었지요. 약속 없이 누굴 만나려면 시간대별 동선을 꿰고 있어야 겨우 마주칠까 말까 했고, 안 되면 온종일 과방과 도서관과 주점을 얼쩡거려야 했지요. "인터 뭐? 아~, 인터포온?" 하던 시절 말입니다. 그러니 책에 눌러 담은 편지 외에 마음을 전할 별다른 길도 없던 시절에는 그렇게 책을 사서 선물했었지요. 그리고 30여 년 전의 그 마음들은 이렇게 바람에 먼지 일듯 일제히 되살아나는군요.
그때 그 청춘들이 어떤 아픔을 맞으며 서 있었는지 이제는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모두 흔들리는 마음돌들을 딛으며 치열한 시간을 건너왔음은 알게 되는 듯합니다.
작가님들, 그렇게 건너온 서로의 시간들을 향해 오랜 안부를 전하기 좋은 계절이 온 듯합니다. 깊어가는 이 계절에 소중한 이들에게 예전처럼 마음을 전할 한 권의 책 선물 어떠실지요?
그리고 만약,
꼭 전하고픈 안부이자 기왕 할 책 선물이라면,
같은 값이면,
책 편지 같은 기억과 치열함으로 눌러 쓴,
무당벌레의 신간으로 하시면 어떠실지….

카톡 선물하기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