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하는 인간

왜 우리는 모순을 지적하는가?

by 김승규

모순에 관하여 많은 생각들을 해왔다. 모순은 왜 일어나는가? 왜 우리는 모순을 지적하는가? 인간은 합리적인가? 등등. 이에 대한 나만의 답을 내려보고 싶었다. 이것이 글의 동기가 될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 보다 나은 문장들로 설명하고 싶었다. 내 머릿속 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고 이제야 글을 쓰는 이유가, 지금 내 문장들이 훌륭하다 생각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여전히 나는 미숙하다. 아마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는 원숙하지 못한 채로 존재할 것이다. 평생 동안 나는 완벽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들어가기 앞서, 나의 모순들부터 고백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얼마 전, 감정을 정의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나 역시 수많은 감정들을 정의하고 있었다. 대중들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추론을 하는 것에 나는 반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들과 다를 것 없었다. 나는 오만하지만 겸손하다. 이성적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감정적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나는 수많은 문장들을 뱉었다. 그러나 내가 뱉은 문장들이 많아질수록, 그 문장들은 내 목을 옥죄어왔다. 나는 나의 생각을 뱉었지만, 다시 말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문장들을 뱉었지만, 오히려 그 문장이 나를 정의하고 있었다. 두 항이 역전된 것이다. 나를 정의하는 문장들 속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만의 특수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재들의 예시에서도 다를 것 없다. 염세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식후 여유롭게 플루트를 불었다. 참여를 외쳤던 사르트르는, 공산당의 폭력에 대해선 침묵을 지켰다.

모순적이다. 너무나 모순적이다. 상반되는 말과 행동, 자주 바뀌는 언행들, 우리는 흔히 이런 것들에 모순의 잣대로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순이란 단어의 무게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순이란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임과 동시에, 모순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모순에 대해 알기 위해서 우리는, 모순에의 지적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모순에의 지적엔 이러한 전(前)이해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이어야 한다’가 그것이다. 모순은 상반된 언행을 행한 존재들을 향한 잣대이다. 상반된 언행은 비합리성의 특권이다. 비합리성을 지적하기 위해, 모순이란 단어로 공격한다. 때문에 우리는 합리성으로 질문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비합리적이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근거를 댄다면, 그것은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나에겐, 그만큼의 지식이 없다. 하지만 구태여 내가 인간의 비합리성을 증명해야만 아는가? 나는 이것이 자명한 사실처럼만 느껴지는데 말이다.

‘1+1=2’는 합리적이다. 항상 참이 나오며, 이걸 의심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 될 것이다. 1+1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저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어느 시간에서나 항상 2를 가리킨다. 우리는 저들이 2를 벗어나는 답을 내놓을까 염려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이를 보고 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 인간에게 적용해 보자.

스스로를 여러 문장들로 정의해 보라. 인간이 합리성 속에서 움직인다면, 정의된 문장 속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1+1=2’는 합리적이다. 저들은 1이 될 수도, 3일 될 수도 없다. 때문에 저들은 정의된 문장 속에서도 언제나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정의하는 문장들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더욱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나를 설명하는 문장에 오히려 내가 정의가 되고 만다. 우리는 모순을 저지르지 않을까 조심조심 발 밑을 살펴보며 걷게 된다. 우리는 정의된 문장에 맞춰 연극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이것이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를 정의하는 문장에 딱 한 줄만 추가한다면, 우리의 자유는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합리적인 존재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그전에, 우리가 더 정확한 논의를 하기 위해선, 합리성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내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단어는 사전적 정의보다 넓은 개념을 포괄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요구에 나는 응할 생각이 없다. 이 역시 합리성에의 요구일 것이다.

인간이 그렇듯,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하다 생각한다. 때문에 단어를 정확하게 정의하라는 요구는 너무나 부조리하다. 때문에 이 글에서 만큼은, 나는 합리성을 거부하겠다. 글의 문맥을 읽고,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비합리성을 두려워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태양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아랍인을 쏴 죽인 뫼르소*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에 우리는, 구태여 물음을 던질 필요가 없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이다. 다시 말해, 뫼르소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선고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합리적인 근거를 대지 못했기 때문에 사형을 받은 것이다. 그는 비합리성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주인공


약에 중독된 창녀 소피와 결혼하겠다던 래리*, 그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 이사벨은 그들의 결혼에 훼방을 놓는다. 그녀 또한 비합리성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 역시 그녀만의 합리적인 잣대로 세계를 설명하려 들었다.

*서머싯 몸 [면도날]의 주인공


개성에 대한 잣대도 그렇다. 우리 인간은 모난 곳을 싫어한다. 개성이 보이면 그러한 부분을 실컷 지적한다. 모난 곳을 완만하게 다듬으며, 그들 존재를 합리적인 모습으로 변양 시킨다. 이러한 지적에 응한 존재들은 합리성의 노예가 될 것이다. 때문에 반항이 위대한 것이다.

모순에의 지적 역시, 비합리적인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합리적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들의 비합리성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밀기 위해선, 타인의 모순을 지적하기 위해선, 그들 본인은 모순적인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모순적인 존재가 타인의 모순을 지적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합리적 작용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때문에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 역시 비합리성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하게 글로 표현해 냈다면, 또 읽는 자가 이 글을 탁월하게 이해했다면, 궁금증이 하나 생길 것이다. 나는 현재 비합리성을 합리적인 추론으로 증명하고 있다. 즉, 이 글은 내가 펼쳐낸 논리로 완벽하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비합리성을 인정했다. 때문에, 모순 속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글의 권리는 다시 회복되었다.

슬슬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나의 비합리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쓰인 글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나는 인간을 이러한 존재임으로 바라본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나 역시 모순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부조리함을 느낀다. 그러나 나 역시 모순적인 존재다. 나아가, 나의 논리 속에서 모순적이지 않은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를 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지 나는 나의 모순을 인지하려 애쓴다. 모순적인 존재가 필연이라지만,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모순점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할 생각이 없다. 애초에 나는 그러할 깜냥이 되지도 못한다. 단지 이 글을 통해 설득되는 사람이 있다면, 타인의 모순을 지적함에 있어서 한번 더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애초에 모순은 필연이고, 스스로도 모순적인 존재임을 인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시작해서 각자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 탁월한 방향성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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