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빠, 아빠와 나

술에 취함에 대한 고찰

by 김승규

학창 시절의 저는, 술을 정말로 싫어했습니다. 엄밀하게는, 술에 취해 스스로 가누지를 못하는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저의 아빠를 말하는 겁니다. 물론 아빠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아빠는, 아주 귀여운 수준일 겁니다.

아빠는 감정 표현에 인색하신 분입니다. 힘든 것도, 행복한 것도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흔히 떠올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보단 유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옛날 사람에,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이미지에 가까운 분이었습니다. 저에겐 그런 존재였습니다.

아빠는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곤 했습니다. 취한 상태에서의 아빠는, 평소와 달라집니다. 붙임성이 좋아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괜히 말을 걸고, 장난을 칩니다. 사람이 가벼워집니다.

그런 모습이 저는 싫었습니다. 술만 마시면 변하는 모습을 보기가 싫었습니다. 고작 술에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처럼만 보였습니다. 정말로 싫었습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저에게 장난을 칠 때마다 저는 부정을 표했습니다. 자주 있었고, 나날이 쌓여갔습니다. 저의 인내심이 다 했을 때가 결국 오게 됐습니다.

그때는 제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심한 욕설까지 뱉으며 크게 싸운 날이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났고, 술에 취한, 너무나 한심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술에 취한 얼굴을 했지만, 권위적인 표정으로 애써 가리려 했지만, 그 속에서 충격을 받은 아빠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저는 속이 좁고 회피형의 인간입니다. 그 일이 있던 후로, 아빠와 근 1년 간, 대화 단절이 있었습니다. 아빠는 계속해서 대화 시도를 했고, 저는 그때마다 피했습니다. 사실 아빠를 조련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충격이 있어야지만, 그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저를 이해시키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빠는 평소 감정 표현에 쑥스러움을 느끼시는 분이고, 그러다 보니 술의 힘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해줬습니다. 물론 당시의 저는 그 말 마저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 한심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풀었고, 그는 여전히 술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왜 아빠가 술을 마셨는지도, 취했을 때의 행동도 이해가 됩니다. 그때보단 세계를 이해하는 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때로는, 술의 힘을 빌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위기를 바꿔보겠습니다.

저의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사유는 자살입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이 사건은 가족에게 큰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상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고모들과 마찰이 있었고, 아빠는 갑작스럽게 회사를 그만두고, 밭일을 물려받아야 했습니다.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와의 유대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슬픔을 연기했습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괜찮음을 연기했습니다. 그는 본인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마저 감정 표현에 인색했습니다.

아빠는 계속해서 저와 누나들을 챙겼습니다. 저는 딱히 슬프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의 보살핌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빠의 괜찮은 모습을 보다 보니, 기괴함마저 느꼈습니다. 그 누구보다 슬픈 사람은 아빠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사유마저 자살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아빠는 그것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저희만 챙겼습니다. 너무나 괜찮은 얼굴을 하고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괜찮음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정말로 괜찮다고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의 죽음이, 아빠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이걸 물어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술의 힘을 빌려 물어봤습니다.

이번 명절 차 고향에 내려갔고, 아빠와 단 둘이 밥을 먹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자연스레 술을 들이켰고, 기회가 보였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역시 감정 표현에 인색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서 배웠을 겁니다. 사건이 있었을 시기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자주 다투셨답니다. 그때마다 술을 마셔 아빠에게 전화를 했고, 아빠에게 여럿 투정을 하셨답니다.

아빠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이 싫으셨다고 했습니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근엄하신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역시 술을 마시고 아들에게 전화로 한풀이를 하셨습니다. 아빠는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화가 나셨답니다.

어느 날엔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쳤고, 그 당시의 날엔 들려오던 전화에 응하지 않으셨답니다. 나중에 전화를 다시 걸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고, 불안해서 찾아갔지만, 그땐 사건이 일어난 후였습니다.

아빠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는 “밭에 농약 치는 것 잊지 말아라”였답니다. 유언으로 기억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문장입니다. 아빠는 이 말을 하며 허탈하게 웃으셨습니다. 눈만큼은 웃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 맺힌 아빠의 모습을 봤습니다.

할아버지 역시 감정 표현에 인색하신 분이었습니다. 술의 힘을 빌려 아빠에게 힘듦을 털어놓았지만, 당시의 아빠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분노를 표했습니다. 저와 아빠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빠 역시, 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아빠 역시, 할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느꼈습니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그때 아빠가, 할아버지의 투정을 들어줬더라면, 할아버지의 고충을 들어줬더라면,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때문에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이 말을 나누고, 저는 엄청난 감정의 고양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 순간의 저는, 아빠라는 이름을 지운,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빠라서 좋은 것이 아닌, 그 사람이어서 좋았습니다. 그 사람이 저의 아빠라서 더욱 좋았습니다.

물론 술이 저를 현혹시킨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잠시 넣어두겠습니다. 의심하는 자세를 좋게 평가하지만, 때로는 좋은 방향의 착각이 더욱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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