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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재(지구에서)와 과거(달)가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Prologue
머지않은 미래인 2050년, 치톤(Chiton)이라는 이름의 단주기 혜성(공전 주기가 200년 이하인 혜성)과 예고도 없이 태양계 바깥에서 찾아온 쌍둥이 성간 천체(3I/Gemini)의 충돌로 자잘하게 쪼개진 소행성 조각들은 변경되어버린 궤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말이라는 현실로 전 세계적으로 혼란과 폭동은 광범위한 산불처럼 퍼져갔다. 세계 각국엔 지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폐쇄 도시'가 생겨났고, 그 안에서 ‘존엄성’, 혹은 ‘자주성’과 같은 인간 고유의 미덕들을 잃은 폭도들은 ‘흰 꼬리’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세상을 전혀 다르게 의식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고, 때문에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겨났다. 확실한 끝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세상, 전 세계 사람들에겐 크게 죽음을 맞이하는 2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1.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사용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영면에 들게 돕는 알약, L-2.
2. 의식과 영혼을 가상 세계로 이주시켜 그 모든 데이터가 탑재된 인공위성을 화성의 궤도에 영구적으로 위치시키는, 인류의 대범하고도 씁쓸한 마지막 프로젝트, 베루마스(VERUMARS project)
달 위에서 자원을 추출하는 국제 기지의 ‘스페이스 메딕’으로서 일했던 한국인 요원 이하나, 그녀는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종말이 공표된 사실조차 모른 채 지구로 귀환해야 했다. 절망적이고, 불가항력적 소식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는 직업적 경험을 살려 울릉도의 재활원에서 자발적 일꾼으로서 환자와 생존자들을 돕는 일을 이어갔다.
재활원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목적지는 베루마스 프로젝트의 아시아 허브인 부산이었다. 본토에서 수송기가 오기 전까지 다양한 종교와,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단절된 섬에서 서로를 가족처럼 보살펴야 했다.
[지구에서]
“그래. 확실한 거지? 최소한, 한 달 전까지야. 이렇게 말을 해도 불안한 건 가시질 않는구나. 그때까지 너도 꼭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사실상 발사 한 달 전에 가든, 지금 가든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나는 이왕이면 하루라도 더 ‘진짜’ 세상에서 보낼 거예요. 푸릇한 잔디나, 차가운 수영장 물 같은 촉감 같은, 그런 것들을 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요.”
“어쨌든 하나야, 우린 그때 말했던 위치에 머물고 있을 거야. ‘N-028’이라는 표시를 기억해야 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기둥이라고 하니까 찾기는 쉬울 거야. 아니면, 포탈에 도착하자마자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겠니? 가상 세상에서 전화 통화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겠다만.”
하나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낀 네모난 유리 반지를 내려다보며 만지작 거렸다. 작고, 투명한 유리조각 안에 마름모꼴 월석(Lunar rock)이 박혀있었다. 검은색 목재 콘솔에 두 팔꿈치를 기댄 채 말소리에 맞춰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야?”
방 안이 딱딱하게 움츠러든 한 여인의 목소리로 채워졌고, 벽에 가로로 걸려 있던 납작한 타원형 기기는 선명한 라임색 오로라가 낀 밤하늘을 한 군데에 응축된 것처럼 어둑한 방을 밝혔다. 타원형 판의 맨 아래쪽엔 ‘경주특별시, 엄마.’라는 검은색의 작은 글씨가 오로라 위에 떠 있었다. 응답을 기다리는 여인이 초조한 숨소리를 뱉자, 타원형 기기는 가운데에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부드러운 파동이 일었다.
“네, 엄마. 그리고 먼저 그곳에 도착하면 느낌이 어떤지 알려주세요. 전부 자세하게. 몸의 움직임부터, 날씨는 대체로 어떻고... 또 사람들은 얼마큼 들떠있고, 밤이 되면 하늘이 얼마나 밝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모든 게 얼마나 생생한지.”
하나가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말했다. 이번엔 콘솔 아래 다리 장식을 발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알겠어. 조만간이야.”
“그런데, 지금쯤 미리 부산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인파가 더 몰려들기 전에.”
“듣기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구나, 우리도 베루마스에 비교적 늦게 참여하는 편이니까. 그보다 네가 있는 곳이 걱정이다.”
“울릉도는 멀쩡해요. 아마도.”
“과연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될까? 아무리 같은 사람이라지만, 그 짐승들이 요 몇 년 동안 우리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그녀의 엄마가 강조한 ‘요’라는 소리에 맞춰 라임색 빛이던 타원형의 테두리에서 적갈색 오로라가 나선을 그리며 중앙까지 흘러들었다.
하나는 콘솔을 짚고 일어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도 알잖니. 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유해한 지...”
“어떻게 잊겠어요.” 그녀가 한 발로 차갑고 까슬한 주트 러그를 밟고 소파 위로 올라갔다.
“가상 세상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어서 이 불안한 시기가 지나가길 바랄 뿐이야. 나도, 네 아빠도. 게다가, 거기도 이 세상만큼 선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야 해. 모든 게 지워진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바뀌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나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그건 진흙탕 색깔의 타원형 옆에 테이프로 붙여둔 그림 한 장이었다. 타오르는 노란색과 엄격한 붉은색, 두 가지 색연필로 흔한 공책 종이 한 장이 사과 씨앗만 한 여백도 없이 칠해져 있었다.
“그럴 거예요.”
그녀는 애써 머릿속으로 제비 뽑기를 하듯이 다른 화제를 떠올렸다.
“엄마, 내가 달 표면에 우리 가족 이름들이 전부 새겨져 있다고 말한 것 기억나죠? 전에 내가 서브루나 베이스 SubLuna Base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 줬잖아요. 푸른 구슬처럼 생긴 지구 사진과 함께. 그것만큼은 영원히 거기에 남아 있을 거예요.”
“기억나지, 아무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세상 어딘가에 우리 가족 세 명의 이름들은 멀쩡히 남아있을 거야. 그 곰인형과, 할아버지 시계는 네가 지구에 도로 가져왔지만.”
“그건 실수였다니까. 엄마와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위한 완벽한 이벤트가 될 줄 알았는데.”
하나가 아쉬움 깃든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알지, 우리 딸. 그곳에 곰인형이 달에 있던, 없던 상관없어. 우린 네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돌아올 수 있어서 행복했고, 우리 가족이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야. 그날이 지나도 말이지..."
하나는 타원형 기기에서 눈부신 라임 빛이 돌아오는 걸 보고는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엄마."
주방에서 삐빅 거리는 전자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서 탁상시계가 두 바늘을 겁 없이 하늘을 향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식 속에 자정이라는 순간은 이미 반투명한 상태였다. 서로 다른 두 날들의 경계, 자정은 예전만큼이나 두려움과 매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현실 세계에 놀라울 만큼 증발해 버린 인구 수와 함께, 새로운 날의 시작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따로 하고 싶은 건 없어? 너도 재활원에서 나올 때가 되었잖아. 만약에 환자나 동료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된다면, 괜한 눈물을 흘리지 말고, 되려 따듯한 웃음을 보여주도록 해. 그들도 곧 모두가 다시 만날 걸 알고 있을 거니까.”
“알아요. 달 기지에 나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도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중이래요. 어제도 동료한테 연락이 왔었는데, 그는 지금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처럼 특별한 여행지가 없다 하더라고요. 한때, 달 기지에 살았던 한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류 출현의 근원지를 찾았다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나는 아무렇게 떠오른 한 생각을 미온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베루마스 프로젝트 허브(Hub)는 모로코에 있데요.”
“그러면, 너는? 여행 떠나고 싶지 않아? 재활원에 사람이 벌써 반이나 줄었다면서. 자발적 일꾼들이든, 환자든.”
“그렇긴 한데.”
그녀는 의도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다. 타원형 기기 위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색깔(적갈색)이나 빛(꺼짐)으로 드러낸다면, 엄마는 늘 불필요한 소란을 떨면서 통화를 몇 시간이고 이어가려 했다.
“잘 생각해. 네 친구처럼 여행도 괜찮은 선택이잖아. 의미도 있으면서.”
“알았어요. 그런데, 여행을 가도 같이 꼭 데려갔으면 하는 아이가 있어요.”
“누구?”
하나는 잠시 말하길 머뭇거렸다.
“폐쇄 도시에서 혼자 구출된 생존자예요. 얼마 전에 다른 병원에서 온 남자아이. 몸 군데군데에 아물지 않는 자상이나 타박상이 너무도 많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끔찍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여기에서 머무는 동안 말 그대로, 한 단어조차 소리 내지 않아요.”
“아이고, 세상에. 그 아이는 혼자 구출된 거야? 딱하기도 해라.”
“어디서 왔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언제나 똑같은 얼굴이에요. 꼭 하늘의 조용한 별처럼.”
하나는 한쪽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가누었다.
“우리가 입은 상처를 대신 드러내주는 별이에요.”
창가로 안개 끼듯 내려오는 희푸른 빛이 바닥에 있던 그녀의 실내화 옆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만개한 다홍색 꽃의 화분을 마치 녹는 얼음처럼 바라보던 소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아이도 자신과 똑같은 빛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작디작은 푸른 점 위에서,
<블루닷 이펙트>
The Blue Dot Effect
약속과 별